김윤석 "좋은 영화 만드는 건 아날로그의 힘"
김윤석 "좋은 영화 만드는 건 아날로그의 힘"
  • 박공숙
  • 승인 2008.01.31 13: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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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호, 설경구가 올곧이 연기력 하나만으로 인정받았던 게 30대 초반의 일. 이제 딱 마흔 살이 되는 김윤석은 40대에 접어들어 날개를 달게 됐다. 자연스레 영화 팬들은 또 한 명의 든든한 주연배우를 갖게 됐다.

다음달 14일 개봉하는 스릴러 영화 ‘추격자’(감독 나홍진, 제작 비단길)는 시사회 후 ‘오랫만에 보는 웰메이드 영화’라는 공통된 평을 받고 있다. 극장을 나서는 시사회 관객은 또한 이구동성 김윤석의 강한 ‘포스’에 혀를 내두른다.

‘타짜’에서의 아귀 역으로 맛보기를 보여줬다면 ‘추격자’에서는 그가 지금껏 쌓아온 연기 내공을 폭발시킨다. 비리를 저질러 잘린 전직 형사 엄중호. 지금은 출장안마소 소장, 대놓고 말하자면 ‘포주’다.

그는 연쇄살인범 지영민(하정우 분)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경찰과 달리 흔적도없이 사라진 출장안마사 미진(서영희)을 찾기 위해 만 하루 동안 사투에 가까운 추격전을 벌인다. 팽팽한 긴장감이 시종 그의 몸에서 분출된다. 그 뜨거운 에너지라니.

김윤석은 영화의 모든 공을 나홍진 감독에게 돌렸고, 자신의 연기는 하정우 때문에 빛을 발한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 영화의 힘은 어마어마하게 준비한 나홍진 감독에게서 나왔습니다.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때 지문이 별로 없고, 대사는 간결하지만 입에 착착 붙더군요. 수 년간 시나리오를 써오며 모든 장면이 감독의 머릿속에 살아 있었다는 겁니다. 휴대전화로 통화하면서 운전하는 장면의 경우 나 감독이 직접 해봐요. 그런 후 ‘운전하며 전화할 때는 이런 문장이 나오지 않는구나’라며 대사를 씁니다.

그러니 대사가 펄펄살아 있을 수 밖에요.” 1박2일에 벌어지는 일이지만 시간상으로는 24시간 정도. 그 시간 동안 엄중호의분노는 각기 다른 표정을 띠고 있다. 캐릭터의 심경 변화가 그의 연기로 전해진다는것 또한 놀라운 일.

“중호가 갑자기 착한 사람이 되고, 도덕적 성찰을 해서 변한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감독과도 ‘찍어가면서 이 놈이 어떻게 변할 수 있는지 보자’고 했죠. 아마 엄중호는 지영민에게 유린당했다는 생각을 했을 겁니다. 그때의 분노와 미진 딸의 자지러지는 울음을 보며 느끼는 분노가 다르겠죠. 또 경찰의 무능한 대처와 나 역시도 찾아도 찾아도 찾을 수 없는, 해결이 안되는 상황을 접했을 때의 분노가 있었을 겁니다. 그렇게 중호의 분노가 변해가는 거죠. 나중에는 이 짐승을 만나서 죽여야 되겠다는 동물적 감각밖에는 남아 있지 않았을 겁니다.” 이런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관객이 눈치챌 수 있게끔 그의 연기가 뛰어났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면서 중호의 분노에 대해 “처음에는 온갖 쓰레기 잡것이 타는 불이었다면, 마지막 불꽃은 잡다한 감정이 사라져 정화된 시퍼런 불꽃이었을 것”이라고 표현했다.

야외촬영은 주로 밤에 이뤄졌다. 그는 배우의 고생보다는 “정말 스태프들이 눈물날 정도로 고생했고, ‘스태프의 승리’라고 말할 수 있다”고 스태프에게 고마움을 거듭 표현했다.

하정우와의 호흡은 어땠을까. 하정우는 김윤석의 신들린 듯한 연기를 감당해내는 역량을 보이며 터질 것 같은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하정우에 대한 김윤석의 칭찬은 생각 이상이었다. 하정우에 대해 묻자 그는 곧바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영화를 두세 번 더 본다면 하정우의 연기가 더 보일 겁니다. 내심 ‘하정우에 묻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 적도 있으니까요(웃음). 정우가 아니었다면 일어날 수 없었던 앙상블이었습니다. 처음 엄중호와 지영민이 맞붙어 좁은 골목길에서 싸우는 신을 우린 ‘개싸움’이라고 표현했는데요, 그 장면을 찍으며 서로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가 생겼던 것 같아요. 지영민이 속으로는 엄청난 분노를 갖고 있는데 겉으론 천연덕스럽게 표현하는 인물이죠. 그런데 가만히 정우의 눈동자, 손놀림 등을 들여다보세요. 지영민의 분노가 그대로 전해져옵니다.

정우는 한 순간도 거짓 연기를 안했어요. 5년쯤 지나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연기파 남자배우가 돼 있을 것이란 걸 확신합니다. 저도 꽤 예민한 편인데 정우는 저보다 더해요.” ‘타짜’에서 단 몇 장면으로 존재감을 확인시킨 후 ‘천하장사 마돈나’로 신뢰를 쌓았고, ‘즐거운 인생’을 통해 넓은 연기 폭을 증명해보였다. 이제 자신의 이름을 건 첫 작품을 내놓은 것. 주연으로 영화에 참여한 후 그는 무엇을 배웠을까.

“주인공이 이런 거구나, 많이 느꼈습니다. 내 캐릭터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영화 전체를 나를 통해 보여줘야 하는 거죠. 예전에는 감독이 ‘OK’하면 그뿐이었는데, 이젠 감독의 컨디션까지 생각해 ‘그게 아닌데’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더군요.” 좋은 작품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기 전의 기분 좋은 설렘이 그에게서 전해졌다. “결국 우리가 말하는 ‘웰메이드 영화’는 아날로그의 힘이에요. 디지털 기술은 아날로그를 위해 존재하는 거죠. 무조건 서로 대화하고 믿고 신뢰해야 합니다. 미국식 합리주의는 우리가 갖고 가야 하는 기본인 것이고 말도 안되는 상황을 말이 되게만드는 아날로그적 노력이 반드시 뒤따라야죠. 정성인 것 같습니다. 영화를 만드는 모든 사람들이 정성 들여 준비하고, 정성 들여 만들면 그 정성을 반드시 알아줄 것이라 믿습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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