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만원 세대’의 비애를 아십니까?
‘88만원 세대’의 비애를 아십니까?
  • 김흥주
  • 승인 2008.01.23 17: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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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연구실에 걸려온 한 통의 전화가 마음을 무겁게 한다. 졸업한지 2년이 지난 이 학생은 오로지 공무원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20대 비정규직의 상징인 소위 ‘88만원’을 받고 밤에는 치킨집에서 배달을 하고, 낮에는 공무원 학원을 다니면서 시험 준비를 해왔다. 그러나 최근 인수위원회가 정부조직을 개편하면서 공무원을 대폭 감축하고, 신규 공무원 채용규모를 앞으로 줄여 나가겠다는 발표를 들은 이후로 좌절감과 분노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전화를 한 것이다.

평소 청년실업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요즘 대학생의 지나친 공무원 시험 준비 현상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나에게도 이 학생의 전화는 몇 가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우리 대학생이 그토록 공무원에 집착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많은 사람은 청년들의 도전의식과 경쟁의식이 실종되었음을 지적한다. 산업화 시기 치열하게 도전하여 새로운 삶의 영역을 만들고, 거기에서 성공신화를 만들어 왔다고 자부하는 기성세대들이 보기에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되집어보면 요즘 대학생들의 공무원 강박 증세는 지난 IMF 관리체제 이후 우리사회를 휩쓸고 있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사회안전망이 구축되지 않은 상황에서 기업도, 국가도 자신과 가족을 보호해주지 않는 다는 사실을 아버지 세대의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느낀 것이다.

청년들 도전·경쟁의식 실종

이런 현상은 비단 공무원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평생의 돈벌이가 보장되는 의사, 약사, 변호사와 같은 자격증 영역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대부분의 학생은 이러한 영역에 포함되기 위해 대학입시에서부터 국가고시까지 광적으로 매달리고 있다. 이른바 대학도서관을 장악하고 있는 고시 폐인이 바로 그들이다. 고시 폐인은 학생들만이 아니다. 한 집안에 고시 준비생이 있으면 가족 전체가 고시를 위한 전투원이 되어야 한다. ‘고3가족’, ‘고시가족’이라는 한국적 현상은 이러한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공적 영역의 일자리가 그리 많지 않다는 데에 있다. 공무원 수는 한정되어 있으며, 국가고시 합격 또한 극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호사다. 때문에 여기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본인의 노력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가 매달려야 한다. 88만원 세대가 비정규직의 서러움과 어려움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참아내는 이유도 평생직장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느 사회든 청년층의 비애가 넘쳐나기 시작하면 미래가 불안할 수밖에 없다. 세대간의 갈등이나 사회혼란은 청년의 분노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제는 88만원 세대의 비애를 한탄만 하지 말고 현명한 해법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해법은 ‘왜’에서 시작하여, ‘어떻게’로 이어져야 한다.

88만원 세대의 비애는 우리 사회가 유연하지 못하고, 적극적인 사회이동의 통로가 막혀 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청년들에게 좋은 일자리를 제공하고, 열심히 노력하면 그 노력의 대가를 정확하게 줄 수 있는 사회가 유연한 사회다. 학벌이나 지역 때문에 차별받지 않고, 개인의 능력을 정확히 평가하여 맞춤형으로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는 사회가 유연한 사회다. 처음 시작은 미약하지만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 언제든지 사회적 이동이 가능한 사회가 유연한 사회다. 대학서열이 평생서열로 고착화되지 않고, 누구에게나 기회를 열려주는 사회가 유연한 사회다. 사회가 유연하면 청년들이 공무원에만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언제든지 상승이동의 가능성과 새로운 도전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개인 맞춤형 일자리 제공

사회안전망의 확충도 시급한 과제다. 88만원 수입의 비정규직으로 살더라도 최소한의 삶의 질을 유지할 수 있는 사회, 생애 어느 시점에서 일자리를 잃더라도 언제든지 새로운 일자리를 찾을 수 있는 사회, 실업 상황에서도 연금이나 복지급여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사회. 이러한 사회가 안전하고 신뢰할 수 있는 사회다. 이러한 사회가 만들어 지는 과정이 곧 근대 시민사회의 성장이자 선진화 과정이다.

새로운 정부의 슬로건이 선진화라고 한다. 선진화는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영역이 있다. 실용과 효율로 성장과 개발을 이끌어가는 것이 정치경제 선진화하고 한다면, 분배정의 차원에서 양극화를 해소하고 사회유연성을 만들어가는 것이 사회 선진화라고 할 수 있다. 혹여 새로운 정부가 참여정부와의 차별성만을 강조하여 사회 선진화를 경시한다면 88만원 세대의 비애는 더욱 깊어질 것이다.

김흥주<원광대학교 복지보건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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