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의 왕 가우스
수학의 왕 가우스
  • 송영석
  • 승인 2008.01.17 14:1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인수<전북대 수학통계학과 교수>
아름다움이란 어떤 것들을 잘 조화시켰을 때 나타난다. 작곡가는 소리를 조화시켜 음악을 만들고 미술가는 형태와 색을 잘 조화시켜 미술적인 작품을 만든다. 시인들은 단어들을 잘 조화시켜 시를 만들듯 수학자들은 아이디어와 논리를 잘 조화시켜 수학적 명제들을 만들어 낸다. 따라서 무엇이든 잘만 조화시킨다면 음악과 미술과 시가 아름답듯 수학도 아름답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수학은 종종 음악과 비교되곤 한다. 위대한 음악가란 훌륭한 연주자와 작곡가 또는 두 가지 모두 능통한 사람으로 분류되듯 수학자들도 수학이론을 잘 이용하는 응용수학자와 수학 이론을 만드는 이론가인 순수수학자, 또는 양쪽 모두가 뛰어난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1700년대와1800년대에 세계수학의 역사를 다시 만든 독일의 수학자 칼 프리드리히 가우스(C. F. Gauss 1777-1855)는 사자가 동물의 왕으로 불렸듯이 수학의 왕이라는 칭호를 받는 인물이다.

“아빠, 그 계산이 틀렸는데요.” 세 살짜리 아들의 말에 아버지는 깜짝 놀랐다. 장부책에 써 넣은 계산이 정말로 잘못되었던 것이다. 가우스가 신동임을 전해주는 이야기가 또 있다. 초등학교 때, 1부터 100까지 더하도록 시키자마자 바로 답을 구하였다고 한다. 다른 학생들이 1+2+3+…9를 계산하는 동안 가우스는 1+100, 2+99, 3+98, …, 50+51와 같은 식으로 하여 101*50=5050의 정답을 구했던 것이다. 나중에 가우스는 자기는 말보다 계산을 먼저 배웠다고 농담을 하곤 했다고 한다.

아르키메데스, 뉴턴과 더불어 3대 수학자로 꼽히는 가우스는 고집 세고 난폭한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다. 그가 수학의 왕이라는 칭호를 받게 된 데는 이런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보호해주고 북돋아준 어머니의 힘이 컸다. 가우스의 어머니는 아들에게서 어떤 위대한 것이 생겨나온다는 희망과 기대를 갖고 있었다. 마치 에디슨의 어머니처럼. 또, 가우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사람으로 외삼촌인 프리드리히가 있다. 그는 베짜는 일을 직업으로 했지만 아주 총명하고 온화한 사람이었다. 그는 누님의 아들에게서 자기와 닮은 성향을 발견해내고는 사물을 꿰뚫어 보는 방법을 가르치는 등 소년의 머리를 단련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였다고 한다. 10세 때, 또 다시 수학 시간에 그의 재능을 발휘한 가우스에게 뷰트너라는 그의 선생은 자기 돈으로 손에 넣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수학 교과서를 사다 주었다. 그러나 가우스는 한꺼번에 이 책을 읽어버렸다. 뷰트너 혼자로는 이 어린 천재를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 그의 조수요한 마르틴 바르텔스는 수학에 정열을 가지고 있는 17세의 청년이었다. 바르텔스와 가우스 사이에 따뜻한 우정이 자라게 되었고, 이것은 바르텔스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두 사람은 함께 공부했다. 어려운 문제는 서로 도와가며 풀고, 수학책을 같이 보면서 그 안에 있는 것들의 증명을 자꾸 해나갔다고 한다. 가우스가 14세가 되자 바르텔스는 가우스를 평생의 후견인인 브라운 슈바이크 공작에게 소개시켜주었고, 가우스는 이 후 학비와 생활비 걱정 없이 수학에 정진하게 되었다. 수학의 왕이라는 가우스는 이처럼 타고난 재능과 그의 재능을 아낀 주변 사람들의 보살핌으로 키워진 것이다.

가우스는 열여덟의 나이로 수학계에 해성으로 데뷔할 당시부터 완전히 성숙해 있었고, 거의 50년 이상 똑같이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많은 비상한 수학자들이 그 꿈을 실현시키기 전 요절한 경우가 많은데 가우스는 77세가 될 때 까지 순수수학과 응용수학에 지대한 업적을 많이 남겼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