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민 동학농민혁명사업회 사무총장
이종민 동학농민혁명사업회 사무총장
  • 임형호 기자
  • 승인 2001.06.10 14: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부(富)와 귀(貴)함. 거기에 명예와 권력까지 보장됐던 석가(釋迦)
는 왜 왕국을 떠나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을
까.
부처와는 고뇌의 색깔이 다를지라도, 현직에 안주치 않고 공동체
를 위해 몸부림을 치는 우리 시대 지성인이 있다.
적당한 수입에 명예까지 보장된 현직 교수가 전공과는 가외로 동학
농민혁명기념사업회를 이끌면서, 107년 전 우리고장을 중심으로 일
어났던 민중 혁명의 의미를 이 시대에 되새겨주고 있다.
* *

전북대학교에서 문학을 전공하는 이종민(李鍾珉.45.영문학박사)교
수.
그는 10년 전인 92년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를 만드는데 굵은 씨
알이 됐다. 올해에는 사무총장직을 맡아, 동학혁명 107주년 기념사
업을 성공적으로 이끌기도 했다.
영문학을 전공한 이(李)교수가 동학농민혁명에 관심을 갖게된 것
은 운명이었을까.
"89년 봄 백제기행 차 지리산에 갔을 때였어요"
그는 지역의 문화계 지인들과 함께 지리산 정령치를 넘으면서 동학
혁명이 일어난 지 100주년을 목전에 두고 있는 시점에서 뭔가를 해
야하지 않느냐는 발상에서 기념사업회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당시 소설가 정도상씨와 임옥상화백.연출가 임진택씨 등이 동행하
면서 필요성에 공감했다고.
지역의 문화 일에 적극적이었던 이(李)교수는 1894년 정읍 고부에
서 처음 일어났던 농민혁명의 불씨를 다시 지피기 위해 인력과 재원
을 모아나갔다.
93년에는 사단법인으로 정식 모양새를 갖추고, 94년 동학 100주년
기념행사를 거행하면서 녹두장군의 정신을 되지피는데 성공했다.
지난달 말 막이 올라 이번달 3일까지 나흘간 도내 각지에서 그야말
로 성황리에 개최됐던 ''동학농민혁명 107주년 기념사업''은 동학
정신과 농민혁명을 세계사적인 반열에 올려놓는 커다란 성과를 이뤘
다.
이와 함께 행사를 치르면서 전주가 갖고 있는 문화역량을 한 군데
로 결집시키는데 성공, 또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 같은 행사의 한 가운데에는 이교수가 자리하고 있다.
이번 행사에는 중국 학자들은 물론, 학생.인권운동가와 학계인사들
로 구성된 일본인 100여명을 참여시키기도 했다.
학술대회만으로 이처럼 대규모로 주변국 관계자들이 전북을 찾기
는 기대키 어려운게 사실. 이교수는 이들을 끌어내기 위해 문화행
사를 기획해냈다.
이번 기회에 전주의 문화를 보여주겠다며 접촉, 중국과 일본의 동
학 관계인들이 전주를 찾게 하는데 성공했다.
실제 107주년 기념사업의 첫날인 5월31일 오후, 전주 완산칠봉에
서 풍남문 간에 이뤄진 동학농민군 입성행군에서는 한바탕 잔치(?)
가 벌어졌다.
풍물패의 길놀이를 앞세우고 연극패들은 거리 굿을 재현해냈다.
풍남문 앞에서 이뤄졌던 주먹밥 먹기는 환경단체들이 도맡아 치러냈
다.
''황토의 꿈, 동학의 노래''로 시작된 전야제 행사는 100여명의
풍물패들이 흥을 돋웠다.
지역의 문화역량을 짧은 기간에 한 곳에 집중시킬 수 있었던 것
은 이교수가 전주를 중심으로 한 문화활동에 정성을 쏟아왔던 덕분
이다.
그는 1987년 지역에 문화전문지를 만들기 위해 고심, 현재까지도
면면이 맥을 이어오고 있는 ''문화저널''을 만들어 냈다.
지금 ''문화저널''은 지역의 자랑이다. 특히 문화인들에게는 자긍
심을 갖게 하고 있기도 하다.
영문학을 전공한 이교수가 지역의 문화활동과 함께 동학기념사업
에 정열을 쏟는 것은 우리 사회를 위해 교수가 연구실에만 안주해서
는 곤란하다는 믿음 때문.
군사정권의 서슬이 시퍼렀던 88년, 그는 민주화교수협의회에 뜻을
더했다. 한 해 앞서 87년에는 6.29를 이끌어냈던 일부 의식있는 교
수들이 직을 걸고 감행했던 ''시극선언 서명교수''로 이름을 남기기
도 했다.
공동체를 위해 일해야 한다는 소신을 실천하기 위해 이교수는 86
년 20여명의 동료들을 모아 연구단체 설립을 준비해 나갔다. 그 결
과 지역사회 연구단체로 완전히 자리를 잡은 호남사회연구가 탄생하
게 된 것이다.
동학기념사업도 이 같은 맥락에서 시작되고, 올해 치러진 기념사
업을 통해서는 우리 고장에서 처음 일어난 농민혁명이 국제사회의
한 흐름으로 이해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동학의 아픔은 지금까지도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교수는 동학정신은 이후 3.1운동으로, 또 4.19혁명으로 분출됐
고, 6.29선언을 이끌어낸 6.10항쟁으로 계속돼왔다고 설명했다.
다만, 친일파를 깨끗하게 일소해내지 못하고 오늘에까지 이르면서
업장이 반복되는 점이 무엇보다 안타깝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앞으로는 젊은이들이 동학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작
업이 한창이다. 이를 위해 대중가수들을 사업에 참여시켜 농민정
신을 주제로 ''랩''을 만들도록 권유하기도 했다.

99년 동학을 주제로 한 음악극 ''천명(天命)''을 광주와 전주에서
공연하면서 큰 관심을 끄는데 성공, 이 같은 문화공연을 통해서
도 대중들에게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정신을
되살리려 아이디어를 짜내고 있기도 하다.
어디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는 식의 냉소주의가 우리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는 점이 가장 안타깝다는 그는 "지역문제와 공동체를 위
한 일에 그래도 교수들이 나서야 한다"고 역설했다.

* *

서울대 영문과 졸(78)
동 대학원 석사 및 박사.
해군사관학교 교관(80~83)
전북대교수(83~)
미국 플로리다주립대학 교환교수(94~95)
서울대학교 교류교수(2000.3~2001.2)
문화저널 편집위원(87~)
호남사회연구회 이사(1999~)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