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구농민 항일항쟁 기념식에
옥구농민 항일항쟁 기념식에
  • 이복웅 <시인.군산향토문화연구?
  • 승인 2001.11.27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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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구농민 항일항쟁 기념식이 지난 15일 군산시 서수면 소재 임피중학교 후원에서 있었다. 이날 행사는 지역인사(지방의원을 포함)그리고 각급 기관장들의 무관심속에 날씨만큼이나 쓸쓸하고 초라하게 치루어져 일제 강점기 조선반도에서 일어난 농민 소작쟁의중 가장 치열했던 옥구농민 항쟁은 역사의식이 바로 서지 않은 채 동네 기념행사쯤으로 전락되었다는 뜻있는 시민들의 지적과 비난의 소리가 높다.

1899년 개항 당시 군산에 거주한 일인수는 77명에 불과 하던 것이 이듬해에는 422명, 1903년에는 1225명으로 계속 증가했다.

일본인들은 본토의 지주(地主)에서부터 떠돌이 낭인(浪人)에 이르기 까지 대거 조선으로 진출하여 토지를 앞다투어 매입하였다. 이들은 군산지방에 미야사끼(宮崎), 시마다(島谷), 오꾸라(大倉)등의 농장을 세웠으며 1905년에 가와사끼(川崎)가 서수면에 농지 900여 두락(마지기)를 일시에 매입 문제의 가와사끼 농장을 세웠다.

그는 니가다현 출신으로 서수에 향리와 같은 모형을 만들어 일본화할 계획을 세웠던 국사주의자이기도 하다. 니가다현은 전형적인 미작(米作)농업지대로 지주들이 전제적 봉건 경영방식을 그대로 하고 있어서 일본내에서도 1912년 북포원군에서 소작쟁의가 발생한 바 그들의 횡포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가와사끼는 본국에 있는 농업인을 유인 농지에 대한 저작권을 부여하고 조선인 소작인들을 자국식으로 관리 감독케 하였다.
이에 따라 서수에는 일본인들의 세대수와 가옥수가 늘어 났으며 1909년에는 향리에 있는 신사신(神士神)까지 옮겨와 서수신사를 세우고 소작인들에게 참배를 강요하기도 하였다.

악명이 높았던 가와사끼가 사망한 후 니가다현 출신 지주들이 종합공동농장격인 이엽사(二葉社)농장을 설립, 서수부, 황등부, 삼례부로 나누어 3개군에 걸쳐 대농장을 경영하면서 가혹한 착취를 일삼았다.

이들은 1927년 11월에 이르러 소작료 75%를 현물 납입할 것을 농민들에게 통보하였고 이에 소작인 단체인 옥구농민조합 서수면지부 교섭이원회에서는 소작료 45%로 하향조정해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농장측으로부터 이를 거절당하고 있다. 당시 전국 평균 소작료는 48%이며 전북지역이 42%에서 46%선으로 징수하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서수 이엽사 소작료는 터무니 없는 착취였음을 엿볼 수 있다.

옥구농민 조합에서는 재차 임시총회를 열어 2차로 농장측에 시정요구를 하였으나 농장측으로 부터 또다시 거부당하기에 이른다.이에 대해 농민들은 소작료 불납을 정식 통보하였다. 이러한 대치 상황에서 11월 25일 일본 경찰에서는 농조지부장 장태성을 검거 압송하다 이를 본 소작인들이 격분, 당일 9시경 대의회를 소집하여 간부와 소작인 300여명이 임피주재소를 습격 장태성을 구출하고 같은 날 10시경에는 서수주재소를 습격하였다.

11월 26일 새벽 일본경찰은 고등계 형사대를 총 출동, 서수농조간부와 소작인대표 36명을 압송한다. 이를 항의 하고자 소작인 500여명이 군산경찰서 앞에서 시위, 주동자 8명이 추가로 검거되어 검거자 중 51명은 군산검사국에 송치되어 31명은 기소되어 전원 형을 받은 농민항쟁의 대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 옥구농민항쟁이야말로 역사적 의미가 대단히 크며 이를 기념하는 행사는 군산정신의 틀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같은 날 오후 시내 모처에서 열린 출판기념회에는 지역인사, 지방의원 그리고 몇몇 기관장들이 경쟁적으로 얼굴 내밀기에 급급한 모습은 옥구농민항쟁 기념식과는 대조를 보이고 있어 이를 지켜보는 시민과 후손들에게 과연 무엇을 어떻게 설명해야 옳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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