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루지기 <575>그리 떡얼 쳤으면...
가루지기 <575>그리 떡얼 쳤으면...
  • <최정주 글>
  • 승인 2003.09.23 18: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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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옹녀의 전성시대 <51>

“그것이사 서방님 맘대로 허시씨요. 암튼지 정사령놈헌테 끌려가지만 마시씨요이.”
“알았구만. 얼렁 댕겨오게. 조선비의 소행이야 괘씸허제만, 한 세상 살겄다고 나온 사람이 아닌가? 아조 쥑이지넌 말게이.”

“서방님얼 만낸 담에넌 이년허고 아랫녁 쪼깨 맞는다고 고태골로 간 사내넌 없었응깨요. 크게 걱정허지 않아도 될 것이구만요. 댕겨오요이. 한숨 더 주무시던지요.”

“아니, 나도 거동얼 해야제. 언제 정사령 놈이 올지 모르는디.” 

강쇠 놈이 부시시 몸을 일으켰다. 새벽까지 살방아를 찧고 맨몸으로 자다가 깬 뒤끝이었다. 가지랭이 사이의 주책없는 놈이 속없이 고개를 쳐들고 잘 댕겨오씨요,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옹녀 년의 눈이 다시 한번 번쩍거렸다. 그 놈을 손으로 쓰다듬어 주며 옹녀 년이 말했다.

“대단허구만요. 그리 떡얼 쳤으면 얌전해질만도 헌디, 또 껄떡그리요이.”

“잘 댕겨오라고 인사럴 챙기는 것이구만.”

“신통헌 놈이요. 잘 간수허씨요. 넘의밭얼 갈아도 이놈언 내 껏이요이. 혹시 내가 저녁에 못올란지도 모르겄소. 그래도 조선비헌테 보개피허니라고 그런갑다 짐작얼 허시씨요.”

“알았구만. 날이 어둬지면 아예 거그 눌러앉으라고. 꼭 오겄다고 밤길 나스지 말고.”

“내가 무섬얼 많이 타서 해만지면 꼼짝얼 못허요. 걱정허지 마씨요, 알아서 헐 것인깨요.”

옹녀 년이 강쇠 놈의 쟁기날을 두어 번 더 쓰다듬어 주고 방을 나왔다. 초가을의 청명한 바람이 치마를 살랑거렸다.

‘흐, 시절 한번 좋구나.’

옹녀 년이 하늘을 향해 흐 웃고는 마천 쪽으로 발길을 틀었다. 서방님 앞에서야 몽둥이질 당한 보개피 때문이라고 했지만, 막상 조선비를 만나러 간다고 생각하자 가슴이 살큼 설레면서 아랫녁 깊은 곳이 따뜻해지고 있었다.

‘내가 잡년언 잡년이구만. 서방님 연장으로 짚이짚이 밭얼 간지 몇 쪼금이나 되었다고 또 밭갈이럴 허고 싶으까이.’

혼자 중얼거리다가, 바람에 흔들거리는 구절초 꽃을 뚝 따서 코끝에 대보기도 하면서 옹녀 년이 한식경이나 걸어갔을 때였다. 누군가 불쑥 앞을 가로 막았다. 아니, 향냄새가 먼저 코 끝에서 살랑거렸다.

“아니, 이것이 누구시래요? 은대암 시님 아니신게라?”

옹녀 년의 손이 저절로 가슴에서 합장했다.

“네 이년, 또 어떤 사내를 잡으러 음기를 풍기며 가고 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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