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루지기 노래 <684>꼼짝없이 호랭이 밥이 될뻔
가루지기 노래 <684>꼼짝없이 호랭이 밥이 될뻔
  • <최정주 글>
  • 승인 2004.02.02 18: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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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뿌린대로 거두기 <2>

아니, 술기운에도 어두워지기 전에 산을 내려가야한다는 생각에 걸음을 재촉하던 어느 순간이었다. 몸뚱이가 한 쪽으로 기우뚱 쏠리더니, 나뭇가지를 잡을 틈도 없이 몸이 밑으로 밑으로 미끄러져 내려가다가 바위덩이에 쿵하고 머리를 부딪쳤다.

그리고 그 순간 정신을 놓아버렸다. 아니, 미끄러져 내리던 그 순간에도 여그서 내가 죽는구나, 꼼짝없이 죽는구나, 서방님을 어이할꼬, 강쇠 서방님을 어이할꼬, 나 없이는 하루도 못 사시는 내 서방님을 어이할꼬,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옹녀 년의 머리 속으로 온갖 생각이 흘러가는데 머리가 바위에 부딪쳤고, 머리 속에서 불똥이 확 튀는가 싶더니, 이내 캄캄한 어둠이었다.

옹녀 년이 정신을 차린 것은 만 하루가 지난 다음이었다. 술이 깨어서 정신을 차린 것인지, 밤을 새우며 포수 박가가 뜨거운 물수건으로 피멍든 곳에 찜질을 해주어서 정신을 차린 것인지, 아무튼 옹녀 년이 눈을 뜨고 보니, 낯선 사내가 인자 정신이 드신기라우? 하면서 무심한 눈빛으로 내려다 보고 있었다.

“여그가 어디요? 아자씨는 누구시오?”

그래도 계집이라고 낯선 사내 앞이 염치없는 옹녀 년이 부스스 몸을 일으키려다가 허리가 끊어질 것같은 통증에 아이구구, 비명을 내질렀다.

“하이고, 시방 움직이면 안 되는구만요. 가만히, 가만히 제시씨요.”

사내가 질겁을 했다. 옹녀 년이 아심찬허요, 하면서 사내를 다시 찬찬히 올려다보니, 그제서야 얼굴이 기억났다. 마천 삼거리 주막에서 딱 한번 마주친 일이 있는 칠선골 포수 박가였다. 그때 노루 한 마리를 통째로 들고 함양장으로 팔러간다면서 잠깐 들려 장국밥 한 그릇을 먹고 갔던 박포수였다. 그때 박포수의 노루 한 마리를 놓고 주모하고 내기를 했던 일도 떠올랐다. 개 꼬막보듯이 무심한 낯빛으로 장국밥만 먹고 옹녀 제 년한테는 눈길도 한번 안 주고 떠났던 박포수가 원망스러워 언젠가는 반드시 내 치마 아래에 무릎을 꿇리리라, 오기를 부렸던 일도 기억이 났다.

“포수 아자씨가 아니시오? 아자씨가 날 살리셨소?”

옹녀 년이 물었다.

“큰 날뻔 했구만이라. 아짐씨가 쓰러져 계시던 곳이 호랭이란 놈이 저녁밥 묵으러 댕기는 길목인디. 늑대란 놈도 득시글거리는 디고라우.”

“그랬소? 꼼짝없이 호랭이 밥이 될뻔헌 이년얼 아자씨가 살려주셨구만이라우. 아심찬허요.참말로 아심찬허요.”
눈물까지 글썽이며 치하를 하던 옹녀 년이 얼굴을 살큼 찡그렸다.

경황 중에 몰랐는데, 배꼽 아랫배가 동산만큼 부풀어올라 오줌보가 금방이라도 터질지경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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