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살아있다
전쟁은 살아있다
  • 최규장(재미 칼럼니스트)
  • 승인 2004.02.24 14: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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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 가을로 다가온 미국 대 선전의 이슈는 뜻밖에도 병풍(兵風)이 아닌가 싶다. 그것도 당장 발등에 떨어진 이라크 전이 아니라 베트남전 때 보인 라이벌 후보들의 행적이 도마 위에 올라있는 것이다. 유권자들은 후보의 인성을 중시한다. 부시 대통령을 꺽을 후보로 민주당은 베트남전 참전용사 존 케리 상원의원을 앞세우고있다. 베트남전이 한창일 때 후방 경비대에 들어가 어물쩍 전쟁을 피한 부시후보를 여론 앞에 닦아세우려는 전략이리라.

 하지만 케리 후보도 약점이 잡혀있다. 참전 영웅으로 남았으면 좋으련만 반전운동에 휩쓸려 줏대 없이 오락가락 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공화당에서는 그를 기회주의자로 몰고 있다. 세계 최강국의 대선 경쟁이 고작 베트남 ‘기피자’ 대 ‘변절자’ 공방전으로 쭈그러든 인상이다.

 한 세대가 갔는데도 베트남 망령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미국을 혼쭐내고 있다. 패배감과 불명예로부터 오는 신드롬에 집단 우울증을 앓는 것인가.

 그러한 판에 88세의 외로운 노인 맥나마라가 안개를 뚫고 나타났다. 그의 요즘 행보는 단연 주목을 끈다. 베트남 확전 때 국방장관으로 대통령을 둘 씩 이나 망가뜨리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인물이 아닌가.

 그는 최근 ’전쟁의 안개’라는 기록영화의 주역으로 나와 기죽은 보수여론을 다독이며 베트남 전을 옹호하고 있다. 마치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괴물처럼 되살아난 것이다. 최근에는 버클리 대학 강단에도 섰다. 버클리는 반전운동의 본거지가 아니던가. 이 자리에는 ‘펜타곤패퍼’라는 베트남전 비밀문서를 폭로해 반전운동에 기름을 끼얹은 더니엘 앨스버그도 객석에 앉아있었다.

 맥나마라는 베트남에서 숨진 58,000명의 미군이 누워있는 곳에서 가까이 살며 통뼈 마냥 버티고있다.

 회고록을 썼지만 참회하지 않듯 영화에서도 ‘맥나마라의 삶이 보여준 11가지 교훈‘을 늘어놓았을 뿐 사과는 없다.

 맥나마라 영화가 아카데미 상 후보로까지 오르는 것을 보면 한국의 극장가가 전쟁으로 달구어지고있는 것이 놀랄 일은 아니다. “6.25때 수제비도 못 먹었다“는 할아버지의 말에 ”라면이나 피자를 먹지 그랬느냐“는 손자의 대꾸만큼이나 우리에게 전쟁은 잊혀져 있었다.

 영화 ’태극기‘가 아니었다면 6.25가 우리네 망각의 창고 속에 아직도 갇혀 있을지 모를 일이 아닌가.

 하지만 영화 덕에 지금 전쟁이 살아나고 있다. 거론조차 금기 시 되었던 냉전시대의 괴물들이 골륨처럼 되살아났다. 영원히 파묻히리라 믿었던 전쟁의 비극들이 벗겨져 나오고 있다.

 나는 외국에 살기 때문에 맥나마라는 보았지만 ‘태극기 휘날리며’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태극기를 보기 전에 실미도를 보고싶다.

 71년 실미도의 비밀이 처음 터질때 나는 중앙일보의 국방부 출입기자였다. 나는 그해 8월 23일에 있었던 일을 영화 ‘실미도’ 보다 33년 먼저 터뜨릴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오류동 현장에까지 달려가 벌집을 쑤셔놓은 듯한 피납 버스와 함께 드러난 비극의 끝을 본 것이 전부였다. 나의 붓대는 두 번 무너졌다. 첫째는 사건직후 군의 거짓 발표를 받아쓰고, 둘째는 훗날 진실을 알고도 쓰지 못한 때문이다.

 “북한 무장간첩 침투”가 “군 특수범 난동”으로 둔갑하며 이리 파묻고 저리 숨기며 그 ‘실미도’의 진실이 제물에 밝혀지기까지 비리고 짠 서해의 파도 물이 얼마나 철썩댔던가. 역사의 씻김굿을 기다리며 어둠의 장막에 가려진 채 누워있는 실미도가 ‘실미도’ 만은 아닐 것이다.

 잊고싶은 것이 전쟁이지만 잊을 수 없는 것이 전쟁이기도하다. 영화가 전쟁의 길을 택하는 어리석은 마음을 돌릴 수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영화는 픽션이다. 전쟁 영화는 역사교육이 아닌 흥행일 뿐이다.

 쏟아지는 전쟁영화가 폭력만이 아니라 다양한 소재와 시각으로 전쟁에 접근하여 인간성을 적시는 작품이 쉼 없이 나오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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