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4년 서울에서 개화파인 오경석 선생의 독자로 태어난 선생은 8살 때부터 한학을 공부하다가 1880년 사역원에서 관료생활을 시작해 1895년 동경외국어학교 교사로 활동할 때까지 한성순보, 국군기무처, 농상공부 등에서 일했다.
1902년 유길준선생의 ‘쿠데타’에 연루된 사실이 들통나자 일본으로 망명한 선생은 동학교주 손병희 선생, 권동진 선생, 양한묵 선생 등과 함께 동학내 ‘문명파’를 형성했다.
1906년 천도교가 창건되자 천도교 기관지인 만세보 사장과 대한협회 기관지인 대한민보사 사장직을 역임하며 천도교에 맞선 일진회을 비판하는 일에 선봉역할을 했다.
선생은 손병희 선생, 권동진 선생, 최린 선생 등과 함께 천도교 대표로 3.1운동 민족대표로 참여해 거사모의와 준비과정에 적극 가담하다 3.1만세 시위 이후 일경에 체포됐다.
선생은 해방 이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 한국민주당 영수, 임시정부 및 연합군 환영회 위원으로 추대됐고 신한민족당 부총재, 서울신문 사장으로서 정치, 사회 분야에서 왕성한 활동을 했다.
노구를 이끌고 백범 김구선생의 장의위원장을 맡았던 선생은 6.25전쟁 중인 1953년 대구에서 9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독립기념관과 서대문독립공원 역사관에서는 선생의 뜻과 공적을 되새기는 별도 전시실을 마련해 선생의 사진 등 관련자료를 3월 한달간 전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