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시대 대학자였던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선생이 태산군수를 역임하였으며 그 옆에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서원의 하나인 무성서원(武城書院)이 아직도 고색창연히 그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다. 고운 선생이 경내에 유상대(流觴臺)를 짓고 경주의 포석정처럼 못을 파서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풍류를 즐겼다던 흔적도 지금 남아 있다.
▼이보다는 뒤인 조선조 우리나라 가사문화의 압권인 불우헌(不憂軒) 정극인(丁克仁)의 상춘곡(賞春曲)을 발생시킨 곳도 칠보다. 불우헌은 이 상춘곡 이외 우리나라 최초의 향약(鄕約=보물 1181호)을 만들어 마을에 음주예절인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펴기도 했다. 칠보와 바로 맞대어 있는 산외는 일제감점에 저항의 불꽃을 가장 먼저 터뜨린 의병창의지다.
▼조선조에 가서는 인맥으로도 적지않은 성세를 떨쳤다. 호남 성리학의 개척자 이항(李恒) 선생(1499∼1576)을 비롯한 영조때의 실학자 황윤석(黃胤錫), 홍대용(洪大容) 등 제제대사들이 모두 이고장 태산으로 연맥지어진다. 여기에 임란에 의병을 일으킨 변사정(邊士貞)이며 전주사고의 왕조실록을 내장산으로 옮긴 손홍록(孫弘錄), 안의(安義) 선생도 모두 태인의 선비들이다.
▼이러한 역사,문화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태산이 어찌 선비마을이 아닐 수 있으며 선비문화의 본고장이 아닐 수 있는가. 그래서 이런 역사적 유서와 전통의 태산선비문화권을 더욱 오늘에 재현하는 것이 오늘에 사는 우리들의 의무다. 그리고 이것이 전승문화의 생명이다. 여기에 동학혁명까지 업으면 내장산을 연계한 태산 선비문화권은 더욱 빛을 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