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산다'는 것의 의미
'잘 산다'는 것의 의미
  • 승인 2004.04.13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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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은 웰빙(well-being)이 사회적 신드롬이 되고 있다. 잘 먹고, 잘 놀며, 잘 살기에 대한 의지나 욕구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다 할 수 없을 것이다. 생물학적 개체로서의 사람이 되었건, 사회적 구성원으로서의 인간이 되었건, 잘 살기는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며 행복 추구권과 밀접하게 연관된 가치가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잘 살되 무엇을 위해-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냐 하는 점이다. 잘 살기에 대한 기준이나 척도가 사람마다 같을 수는 없는 것이며, 설령 동일한 가치를 추구한다 할지라도 그것을 실현하고 자기화하는 데에는 서로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며, 마땅히 달라야 할 것이다. 그것은 가치관과 세계관의 차이는 물론이요, 개성적 존재로서의 자기존엄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도 당연하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근래 우리 사회를 보면 ‘잘 살기’에 대한 기준과 척도가 평준화-획일화되고 있지 않느냐하는 의구심이 든다. 사람됨의 본질인 내면적 충실성은 외모 지상주의에 함몰된 지 오래다. 인간성의 함의가 무엇으로 채워져 있건 겉만 번드레하면 그만이다. 그만인 정도가 아니라 그런 형식적인 겉치레를 더 높이 평가하며 선호한다. 이런 사회적 풍토는 우리의 삶을 총체적인 병리현상으로 몰아가는 동기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할 만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회적 요구와 기대에 부응하기 위하여, 외과적 수술을 통해서라도 자신의 외모를 객관적 기준에 맞는 용모로 뜯어 고치려 한다. 물론 자신의 개성적 특성은 철저히 무시되고, 오직 인구에 회자되는 그런 외형을 닮으려 본래적 자아를 버리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아울러 그런 데에 소모되는 정신적 물질적 비용은 잘 살 기 위한 기회비용으로 생각하여 아깝다 하지 않는다. 본래적 자아를 버리고서라도 기필코 잘 살아야 하는 현대인들의 초상이 안타까울 지경이다.

이런 현상들의 결정판은 아마도 ‘얼짱’이 아닌가 한다. 이런 비어(鄙語)나 이언(俚諺)은 언어적 유행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가치체계로 굳어진다. 이렇게 언표(言表)된 현상들은 이미 일정한 코드를 형성하여 우리들의 사고방식과 행동방식을 규제하게 된다. 그러니 얼짱이 아니고서는 잘 사는 대열에서 낙오된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얼짱이 못된다고 생각하는 당사자들에겐 매우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을 것이다.

학벌주의 병폐도 이런 현상에서 멀지 않다. 실력이야 있건 없건 어느 대학의 간판을 달고 있느냐는 하는 것은 한 사람의 사회적 위상과 함께 잘 살 수 있는 대열에 진입하느냐 못하느냐를 결정짓는 관건이 되고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난제 중의 하나는 바로 우리 교육의 난맥상일 것이다. 우리나라 교육이 안고 있는 이런 문제의 저변에는, 어떤 혜안으로도 극복할 수 없는 맹목적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 잘 살아야 하겠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잘 살아야 하겠다는 집단적 욕망기제가 또아리를 틀고 있다.

그런데 이런 현상들은 공통되는 특성이 있다. 사유방식과 행동특성의 기준과 척도가 모두가 내[自我]가 아닌 남[他人]에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내 나름대로’가 지니고 있는 고유한 개성과 가치관은 이미 ‘남 나름대로’에 팔아넘긴 지 오래다. 나는 이미 내가 아니다. 나[주관]를 통해서 세계[객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남[객관]을 통해서 자아[주관]를 가진다. 그러니 나의 중요성은 이미 용도 폐기된 지 오래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진정성의 나는 사라지고, 형식성의 타인만 존재할 따름이다. 나를 잊고 사는 시대, 그것이 잘 사는 것을 행복의 최대치로 여기며 사는 우리 사회의 병폐다.

이러므로 대학을 나오지 못했어도 국민적 지지를 받아 당당히 대통령이 된 사람. 그가 우리나라 역사 이래 초유의 몸낮춘 대통령으로 개혁을 이루어 잘 사는 나라, 잘 사는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소망이 무참하게 탄핵될 수밖에는 없는 것인가.

그럴 수는 없는 것인가 보다. 그렇기 때문에 193명이나 되는 이 나라 최고의 얼짱이요, 지성짱이요, 간판짱이요, 권력짱이요, 돈짱인 국회의원들이, 저마다 독립적 입법기관인 국회의원들이 저마다의 주관과 인간적 진정성을 버리고, 당리당략이라는 남나름의 집단행동에 동참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렇게 해서 홀로, 혹은 저들끼리만 잘 살면 무슨 의미와 가치가 있을까? 배타적 독점과 집단적 독선만이 잘 사는 길은 아니지 않는가.

진정 잘 사는 길은 공동체적 가치와 선을 추구하려는 살신성인 공명정신의 실현에서 찾아야 한다. 진정 잘 사는 길은 인간존재의 엄숙성을 증명하기 위하여 자기희생을 감수하려는 겸손한 실천윤리에서 찾아야 한다. 진정 잘 사는 길은 비인간적인 형식논리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인간성을 지킴으로써 자아를 실현하려는 하려는 노력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집단적 병리현상을 대통령 탄핵이라는 초유의 사태가 극렬하게 보여주었다. 차제에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진정 잘 사는 길에 대한 성찰이 통렬하게 이루어져야 하겠다.

이동호(이동호내과의원원장·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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