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분
명분
  • 승인 2004.05.03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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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맞아 죽을 각오로’ 마음을 단단히 먹고 누군가 낸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화두는 한때 국내에서 가장 충격적이면서도 신선한 논란으로 애독.시청.토론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유교의 명분론이 공리공론, 허례허식, 위선에 이르고 당쟁과 국론분렬을 낳는다는 극단적 비판론에 어지간히 동조하는 분위기도 적지 않은 탓일 것이다.

 ‘중국은 자본주의가 판을 쳐야 하는 나라’이고 ‘한국은 상대적으로 자본주의가 꽃피기 어려운 나라’라는 시각도 비슷한 맥락이다. 실사구시에 먼 쟁론적 체면적 성격의 한국 정치 풍토의 조성과 왕정시대의 전통적인 명분 논쟁의 내림이 그런 비교를 올리게 한 나변의 이유일 것이다.

 중국이 고래로부터 상업과 부를 중요시하고 실질적이고 즉물적인 한족적 이미지와 규범, 성격을 두드러지게 내비치고 있는 데 비하면 한국의 사농공상은 공,상인의 천민적 지위와 신분적 굴레의 지속적 속박을 강요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먹고 사는 것의, 실물경제의 천박성 간주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을 게다.

 4.15총선이 끝나고 중도에서 더 왼쪽으로, 중간에서 조금만 오른쪽으로 혹은 오른쪽에서 조금 왼쪽으로, 왼쪽에서 조금 오른쪽으로 등등의 이념적 좌표 정립을 둘러싸고 여야가 공통으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모습이다. ‘이념이 밥먹여 주는 것 아니’라는 것을 전면적으로 반박하며 ‘이념이 곧 밥이 되는 듯이’ 보일 풍경이다.

 총선후의 첫 모습이 이렇다면 ‘자본주의 하기에 잘 안 맞는 나라’의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정치가 이념 노름으로 전락하였다가 망한 것이 바로 구소련과 동구권을 중심한 공산주의 국가의 생생한 예요, 공산주의 체제이면서도 현실적 실리정치로 폭발적 부의 축적에 진군나팔을 올린 것이 중국이라면 이념적 좌표 논쟁의 과잉 몰입은 시대착오라 할 수 있다.

 공론과 쟁론이 같이 가는 것은 그 자체로 비생산을 재생산하고 태풍의 눈처럼 가속력을 붙이기 마련이다. 그런 논쟁은 최소한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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