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시청은 또다른 입시지옥
EBS시청은 또다른 입시지옥
  • 승인 2004.05.21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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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가 필요없다는 얘기잖아요!”

일반계고교 2학년인 딸 아이가 EBS수능강의 시청을 두고 내지른 말이다. 말인즉슨 수업시간에 선생님을 통해 공부하는데 따로 EBS를 봐야 수능에 대비할 수 있다면 도대체 학교는 뭐하러 다니냐는 것이었다.

나는 내심 놀랐다. 한편으로는 그런 속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공부놀음’에 잘 견뎌주는 것이 대견하기도 했다. 아침 7시에 집을 나서고(학교까지는 도보로 10분거리다.) 밤 11시 30분쯤 돌아오는 딸아이를 보노라면 이 땅의 교육현실때문 이민 간 사람들의 심정이 절로 이해될 정도이다.

왜 대한민국의 고교생들은 그렇듯 ‘뒤지게’ 공부를 해야 하는걸까? 공교육 활성화대책을 잔뜩 기대했지만, 지금 교육부는 엉뚱하게 ‘사교육비 경감대책’이라는 ‘한 건’으로 더욱 공교육을 죽이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EBS수능강의시청도 그 중 하나이다.

깊이 생각해보자. 아무리 정보화시대의 인터넷 세상이라지만 하루 종일 교사들이 가르치는 공부는 도대체 무엇이기에 지루하고 딱딱한 TV를 또 봐야 한단 말인가! 정부 스스로 앞장서서 학교의 공교육을 부정하고 무시하는 EBS시청인 것이다.

거기에는 사제간 커뮤니케이션의 소중함, 그러니까 인간 대 인간의 정서적 관계가 전면 무시되어 있다. 기계에 의존하려는 비정적 매커니즘만이 번득거린다. 아무런 교감(交感)도 없이 마냥 문제풀이만 하는 TV를 통해 수능시험을 준비하라니, 그러고도 제대로 된 나라의 올바른 대책인지 묻고 싶다.

내가 흥분하는 것은, 그러나 교육부로부터 다시 한번 무시당한 교사들 입장때문이 아니다. EBS시청이 학원수강이나 과외 등은 줄어들게 할지 몰라도 학생들 입장에선 입시지옥의 교육현실에 또다른 부담만 가중시킨 옥상옥의 대책 아닌 대책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한때 ‘교육부 무용론’이 제기되었지만, 이제 학교를 아예 없애버려야 한다는 얘기가 설득력을 얻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학교의 공교육이 자꾸 죽어가고 있어서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집에서 EBS강의만 시청하면 대학에 갈텐데 왜 이런저런 돈을 들여가며 학교에 다녀야하는지, 절로 생기는 의구심을 떨칠 길이 없다.

한편 보도에 따르면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EBS시청료를 걷는 학교가 생기기 시작한 것. 하긴 방과후 학생들끼리만 보게 하면 개판될게 뻔하다. 말할 나위없이 싫어하는 아이들을 야간자율학습처럼 강제로 가둬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교사들에게 무조건 헌신?봉사하라며 ‘맨입’으로 떼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교사에게 감독수당이라도 줘가며 지도하게 해야 하는데, 당국의 예산지원은 없으니 그렇게라도 할 수밖에. 애써 이해하자면 그렇다는 말이거니와 EBS시청을 통한 사교육비경감대책의 허구성이 확인된 셈이다.

무엇보다도 심각한 문제는 10명중 6명의 교사가 EBS 강의의 수능 연계에 대해 학교교육 파행의 원인이라는 이유로 철회해야 한다는 부정적 인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EBS시청은 교육의 주체인 교사와 학생을 무시한 또다른 입시지옥인 셈이다.

진짜 이대로는 안된다. ‘학교가 필요 없다는 얘기잖아요!’라는 인식을 갖고 그렇듯 ‘뒤지게’ 공부에 임한 딸아이가, 불길한 가정이지만 그저 그렇고 그런 대학에 들어갔을 때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게될지 그것이 두렵다.

장세진<전주공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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