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상의 웃음
천상의 웃음
  • 태조로
  • 승인 2004.05.25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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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였을까. 창밖엔 소리도 없이 가녀린 봄비가 내리고 있다. 나무마다 돋아난 연초록의 잎새들이 새로이 몽울진 봄꽃들과 어울려 청초한 아름다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작은 창밖으로 펼쳐진 전경은 마치 뿌옇게 서리 낀 유리창을 깨끗이 닦아 낸 것처럼 선명하고도 시원스러워 보였다. 쇄쇄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낡은 커피포트에서는 뜨거운 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오늘따라 커피포트의 요란한 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커피 잔을 들고 창가에 서서 사라브라이트먼의 글루미 선데이를 들었다.

천상의 목소리 같은 그녀의 고운 음성이 음울한 선율과 묘하게도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가느다란 빗방울을 흩뿌리는 연회색 하늘을 무심히 바라보며 커피 한 모금을 머금었다. 순간 커피의 떫은 쓴맛이 입안을 감돌며 온몸으로 퍼져 들어왔다.

요즘 기분 좋지 않은 일들이 연속되어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개인적으로 바라던 일들이 뜻대로 되지 않아 마음이 편치 않았던 차에 친분이 있는 사람들의 좋지 않은 소식이 나를 더욱 힘들게 한 것이다. 지난 겨울 같은 성당에 다니는 뇌성마비 장애인을 도와드린 적이 있었다. 석 달 사이에 이가 무려 20개 이상 빠져 남은 이로는 도저히 음식물을 씹을 수 없어 틀니를 꼭 맞춰야만 하는 분이었다. 여러 곳의 치과에 문의해 본 결과 300만원 이상의 거금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분은 생활보호수당으로 생계를 어렵게 유지하는 형편이었고 나 역시 도울 수 있는 경제적 여력이 없었다. 그래서 무료로 시술할 곳과 후원자들을 찾아 백방으로 알아보았지만 그것 또한 쉽지 않았다. 기도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하늘은 무심치 않았다. 얼마되지 않아 무료로 시술해 주겠다는 의사와 후원자의 도움으로 틀니를 맞출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눈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행복에 겨워하는 그분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지금껏 맛보지 못했던 다른 차원의 기쁨과 행복감이 가슴속 깊이 밀려들었다. 이 일이 진행되면서 또 하나 감동했던 것은 후원자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이 아닌 그것도 시각장애인이었다는 것이었다. 그분은 “저에게 나눠줄 수 있는 행복을 주셨습니다”라며 기쁨으로 도와주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예전에 누군가에게 어렴풋이 들은 말이 떠올랐다. 부자가 더 옹색하다는. 가난하고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볼 때마다 안타까워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그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사람은 보기 어렵다.

나 또한 이전까지 말로만 하는 사랑이었으니까 행함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는 성경의 구절이 생각난다. 그렇다면 실천 없는 사랑 또한 그 자체가 죽은 사랑이다. 이젠 그 말씀의 뜻을 가슴으로 이해할 것 같다. 어쨌든 그분이 소박한 행복이나마 오래도록 누리기를 원했는데 얼마전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고 말았다

한 달 전 소화가 잘 안 돼 병원에서 진찰을 받았는데 위암이라고 진단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미 암이 위 전체의 삼분의 일이나 전이가 되었다고 한다. 순간 가슴이 철렁하고 내려앉았다. 어쩐지 최근 얼굴이 많이 여위었다 했다. 눈앞이 캄캄했지만 어찌 수습해야 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냥 한 숨만 나올 뿐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그분의 후원자 분에게서도 가슴 아픈 소식이 전해졌다. 투자한 사업체가 문을 닫게 돼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입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추스를 사이없이 봇물 터지듯 한꺼번에 밀려온 슬픈 소식들은 나를 저 바다 깊은 곳으로 하염없이 끌어내리고 있었다.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갑자기 하나님이 미워졌다. 원망스러웠다. 안그래도 삶이 힘겨운 사람들인데 복은 주시지 못 할 망정 고난만은 피하게 해주셔야되지 않겠는가.

부패하고 악독한 사람들이 오히려 흥하는 부조리한 세상을 한탄해 가며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하며 한동안 쓸쓸함에 잠겨 있을 때 뇌성마비 장애인 분에게서 연락이 왔다. 서로 안부를 나눈 후 병의 진척과 치료비 등 실질적인 문제들을 한참 묻고 있는데 그분의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한참을 웃으시더니 나는 괜찮으니 염려 하지말라며 나를 위로해 주시는 것이었다. 그리곤 문병을 허락지 않는다며 입원해 있는 병원도 알려 주시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내 병을 고쳐 주실 것을 확실히 믿는다면서 말이다. 이튿날 공교롭게도 후원자분과도 만날 기회가 있었다. 한동안 집 안에서 두문불출 하며 연락도 없으리라 생각했었는데 오히려 그분께서 먼저 연락을 해온 것이었다. 그리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웃고 농담까지 하는 그를 대하는 내가 더 당황스러웠다. 과거는 과거 일뿐이고 현재가 내겐 더 소중합니다. 그리고 미래도 있습니다. 예전보다 한 걸음씩 더 뛴다면 회복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어요. 저 보다는 투병 중이신 그분이 더 걱정되네요.

창 밖에 내리던 비는 언제부터였는지 더 이상 내리지 않았다. 흐린 하늘의 구름사이로 옅은 햇살이 연초록 나무잎마다 맺힌 빗방울에 투영되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커피 잔에 남은 한 모금의 커피를 마저 들이키며 이들이 보인 웃음을 음미하였다. 한 사람은 죽음의 갈림길 앞에서 또 한 사람은 밑바닥까지 추락한 큰 좌절앞에서 소망을 가지고 웃을 수 있는 그 의연함이 그리고 타인을 위로하는 그 따스한 사랑이 나의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에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리기 위해 지상에 내려온 천사들처럼 이들 또한 나에게 보내어진 천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왜냐하면 이들의 웃음과 사랑은 이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천상의 것이기에. 비 온 후 맑게 갠 화창한 봄 날과 같이 그분의 병이 깨끗하게 치유되기를 그리고 더 크고 고귀한 사랑을 나눌 수 있게 축복 받기를 오늘 두손 모아 기도한다.

송경태(전북장애인신문사 발행인, 전라북도시각장애인도서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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