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시와 화시
증시와 화시
  • 최규장
  • 승인 2004.05.27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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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입국 바람이 불어 너도나도 미술관을 짓던 일본의 지자체들이 고민에 빠졌다. 전시장은 근사한데 무엇으로 그 큰공간을 채운 단 말인가. 정부는 현(縣)마다 1억 엔씩 지원금을 주며 등을 떠밀었다.

돈을 받은 현의 고민은 더 깊었다. 1억 엔으로는 턱도 없기 때문이다. 어느 현에서는 묘안을 짜냈다. 1억엔 어치의 금덩이를 번쩍이는 유리상자에 넣어 미술관 한복판에 전시 한 것이다.

세계의 그림 값을 올려놓은 것이 일본이다. 80년대 잘 나가던 때였다. 창사 100주년기념으로 고흐의 ‘해바라기’를 사상 유례 없는 4천만 달러에 사들인 일본 기업이 있었다. 한번 떠오른 해바라기는 고개 숙일 줄을 몰랐다. 고흐의 만년 작 ’의사 가쉐의 초상‘이 뉴욕의 크리스티 경매에서 ’해바라기‘의 곱절 값에 주인을 바꾸었다. 그 역시 일본인 수집가였다.

경제의 거품이 빠지고 외환위기가 소용돌이치는 속에서도 미술품 가격경쟁은 식을 줄을 몰랐다. 부자가 망해도 몇 해를 간다더니 창고 속의 고가 그림이 되레 효자노릇을 했다.

최근 뉴욕의 소더비 경매에서는 마침내 그림 한 점 값이 1억 달러를 돌파했다. 피카소가 24세 때 그린 ‘파이프를 든 소년‘이 우리 돈으로 무려 1200억 원에 팔린 것이다. 100년을 기다린 피카소의 ‘파이프’는 남가일몽이 아니었던가.

세상이 바뀐 것은 천정을 찌르는 그림 값만이 아니다. 시장의 큰손이 바뀌었다. 마이크로소프트와 할리우드, 그리고 월가의 돈줄이 삼각파도처럼 미술시장을 널뛰게 한다. 유럽 왕실과 라스베가스의 도박사들이 투자자로 떠오르고 그림수집이 국책사업인양 갑자기 사막에 미술관이 5개씩이나 생기는 석유왕국도 있다.

미술품이 증시의 우량주나 도박판의 칩처럼 거래되지만 시장이 곧 미술평가장은 아니다. 그림 값 1억 달러는 그림의 소유권일 뿐, 1억 달러의 그림가치를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피카소 연구자인 존 리차드슨은 ‘파이프를 든 소년’은 “내가 좋아하는 피카소 20걸에도 들지 못한다”고 말하고있다. 하지만 이 말은 미술 시장의 엄청난 깊이를 점치게 하는 무서운 말이다. 피카소 만해도 유화만 2만점이 넘지 않은가. ‘아비뇽의 처녀들‘마냥 경매에 나오지 않고 조용히 벽에 걸려있는 걸작들이 시장에 나온다면 천문학적 그림 값은 헤아릴 수조차 없을지 모른다.

예술과 돈은 별개의 세계다. 피카소가 파리에 발을 내 디뎠을 때 누가 거들 떠나 보았는가. 걸작 뒤에는 비전을 가진 화상이 있다.

크게 성장했다는 우리 미술시장의 한 해 규모가 피카소 한 점 값이다. 미술시장의 작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에 머물러있는 우물 안을 벗어나자는 것이다. 피카소의 ‘파이프’는 1억 달러에 팔렸는데도 피카소 중 최고품(MVP)이 아니라지 않는가.

‘피카소쇼크’에도 아랑곳없이 뉴욕의 현대화(Contemporary-Art) 봄 경매장에서는 옥션에 나온 작품의 100%가 팔려나가 미술시장의 균형과 건재함을 과시하고 있다. 값싸고 좋은 작품은 얼마든지 있다는 듯 세상에 막 나온 신인 화가로부터 거장에 이르기까지 수집가들의 사랑을 흠뻑 받고 있었다. 대가의 명작에만 집착하지 않고 숨은 보배를 발굴하는 가치창출이야 말로 가장 값진 일이 아닌가.

우리나라의 기업현금이 사상 최대인 65조원에 이른다. 기업들이 투자를 못하고 현금을 움켜쥔 채 빚을 갚거나 배당금으로 나누어주고 있다.

하릴없는 돈방석에 앉아 고작 “빌딩이나 사둘까“라고 하리만큼 피카소는 엽전을 유혹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림은 즐기는 것이지 돈 만들기는 아니다. 하지만 예술은 소프트파워다. 땅이나 기름, 금덩이와는 달리 인간이 만든 가치창조물이다. 투자 할 곳이 없어 예술품을 찾기보다 투자의 분산과 다변화의 전략아래서 돈이 돈을 키우는 미술시장에 눈을 떠야한다. 부와 함께 예술의 환희를 동시에 추구하는 드높은 삶의 방식을 터득하는 안목을 기르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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