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칼럼]작은 들꽃 같을지라도
[여성칼럼]작은 들꽃 같을지라도
  • 승인 2004.06.01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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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박혜숙
기라성 같은 문단(文壇)의 선배님들을 처음 뵙는 어느 날이었다. 긴장이 되어 남모르게 쩔쩔 매고 있는데 식사와 반주(飯酒)가 곁들여진 음식이 푸짐하게 차려져 나왔다. 담소와 함께 잔이 몇 번 오가면서 문인들 특유의 감성 교류가 이루어져서 어느 정도 마음의 평정을 찾았을 때,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기어이 질문을 하고야 말았다.

  안주로 나온 은행(銀杏)이 시선을 끌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보아왔던 은행들은 매끄러운 껍질 두 장이 대칭으로 맞붙어 있는 튼실하고 큼직큼직한 것들이었다. 그런데 오늘 나온 은행은 껍질 세 개가 오밀조밀 붙어 있을뿐더러 크기도 훨씬 작아 볼품이 없는 것들이었다.

  편안하게 말을 건넬만한 자리가 아닌 만큼 이런 사소한 궁금증은 웬만하면 그냥 묻어둘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입은 어느새 말을 하고 있었다.

  “선생님! 이 은행은 보통 은행과 달라요. 껍질이 세 개나 붙어있고, 작고 예쁘지도 않아요. 참 이상한 은행이네요?”

  풋내기 신입회원의 엉뚱한 질문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키가 훌쩍 크고 유난히 친절하시던 선생님께서 자상하게 말씀을 해주셨다.

  “국산(國産)이라서 그래요. 수입산(收入産)은 상품가치가 높은 것으로 선별한 것이기 때문에 크고 모양새도 좋은 편이지요. 하지만 이게 작아도 맛은 아주 좋답니다. 이것이 바로 신토불이(身土不二) 국산의 맛이지요”하시며 손수 껍질을 깨물어서 까주시는 것이었다.

  작은 알맹이 하나를 먹기 위하여 필요한 만큼의 수고를 해야 하는 과정이 즐거웠다. 어렵사리 껍질을 벗기고 서로 나누는 손길이 처음 만나는 자리라 할 수 없을 만큼 정다웠다.

  음식을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누다보니 자연스레 거리는 좁혀지고, 서로의 모습을 보면서 흥취(興趣)가 깊어갔다. 그때 국산 은행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던 선생님께서 갑작스런 질문을 해오셨다. “손이 왜 그렇게 작아요?”

  “네. 국산이라서 그래요. 선생님은 수입품, 저는 국산품….”

  “하하하! 허허허!”

 신출내기의 당돌한 응수에 그 순간 웃음바다가 되었고, 분위기가 한결 무르익어서 선생님께서는 시조창(時調唱)을 불러주시기까지 했다.

  문단의 어르신을 수입품이라고 한 것은 그 분을 폄하(貶下)하기 위함은 결코 아니었다. 월남전 참전 용사이셨던 기백이 지금도 느껴지고, 많은 문단활동에서도 모습을 나타내시는 그 분이 마치 가치가 높은 엄선된 수입품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곡해하거나 노여워하지 않고 유쾌하게 받아들이시는 인품이 흐르는 물과 같이 여유로웠다.

  나를 국산품이라고 표현한 것도 자신을 비하함이 아니었다. 왜소하고 외모가 출중하지 못해도, 작은 들꽃처럼 내면의 향기를 포기하지 않은 사랑스러운 여자임을 은근히 과시했다고나 할까?

  아름다워지기 위한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고들 한다. 그래서인지 이 나이쯤 되면 몇 군데는 영구화장(문신)이라는 것을 하고 미용에 관한 정보를 기웃거리면서 얼굴에 수색이 짙어지기도 하는데 차라리 외모로부터 자유로워지면 어떨까? 인위적 미인이기보다는 타고난 그대로를 소중히 여기고 당당해진다면 그 속에서 나만의 향기가 풍기지 않겠는가!

  점점 노출이 심해지는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 어디 혹시 가장 국산스러운(?) 여인을 퀸(Queen)으로 뽑는 행사는 없을까?

박혜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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