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칼럼]결혼 기념일 선물
[여성칼럼]결혼 기념일 선물
  • 승인 2004.06.08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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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이맘때, 결혼 10주년을 맞이하여 남편이 나에게 준 선물은 명품 핸드백이나 보석 세트가 아니었다. 한달 전부터 무엇을 선물할까 고민하기에 나는 대단한 선물이라도 준비하는 줄 알고 은근히 기대를 했었다. 남편이 심사숙고한 끝에 데려간 곳은 스포츠용품 전문점, 그곳에서 마라톤 신발과 바지를 골라주더니 쓰다 남은(?) 스포츠 센터 이용권을 보너스로 얹어 주는 것이었다. 그 때의 황당함이란! 결혼 10주년 기념 선물치고는 너무 기대 밖이어서 저으기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혼 10주년 기념 선물이 고작(?) 운동화와 팬츠라니, 이만 저만 손해나는 장사가 아니다 싶어 야속한 마음까지 들었던 게 사실이다.

 당시 남편은 달리기에 재미를 붙이면서 마라톤 마니아가 되어가고 있었다. 결혼 무렵 보기 좋은 체구이던 남편은 그 체구 탓에 동료들과 나지막한 산행에서 뒤쳐져 자기보다 체구가 작은 선배들의 부축을 받으며 거의 초죽음이 되어 집에 돌아온 적이 있었다. 그 사건이 적잖이 충격적이었던지 그 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산을 다니기 시작했으나, 7-8년 전에는 통풍이라는 질병에 시달리면서 지속적인 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 모양이다.

 이태 전 어느 날 새벽, 아파트 앞 초등학교 운동장 한바퀴를 돌고 오던 남편은 이튿날 다섯바퀴를 뛰고, 그 다음날에는 천변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혼자서 바람처럼 뛰었다. 시내 중심가로 이사를 한 다음에는 달리기 코스가 마땅치 않다고 안타까워했으며 이주할 집을 고를 때는 반드시 가까운 곳에 달리기 적합한 곳이 있는지가 중요한 선택 기준이 되었다. 그리고 크고 작은 달리기 대회에 나가기 시작해 5㎞ 건강 달리기, 10㎞, 하프 코스로 점점 도전의 폭을 넓혀갔다. 하프를 완주한 남편은 보다 체계적인 운동이 필요하다며 직장 마라톤 동우회에 가입을 했고, 가을과 겨울 꾸준히 연습을 해서 올 봄에 전주-군산 벚꽃 마라톤 대회에서 42.195㎞를 완주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제야 고백하지만, 하프에 도전할 때 목이 빠져라 기다려도 남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도중에 포기하고 앰뷸런스에 실려오는 줄 알았다. 그런데 지정 시간 임박해서 끝까지 최선을 다해 뛰는 남편의 모습을 발견했을 때 참으로 기쁘고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올 봄 처음으로 풀 코스에 도전할 때만 해도 역시 같은 마음으로 큰 기대를 하지 않았고, 다만 부상이 없기만을 바랐을 뿐인데, 차량 통제 시간 임박해서 건강한 모습으로 씩씩하게 골인지점을 향하는 모습을 보니 믿음과 신뢰가 더해졌다.

 달리기의 장점은 무엇보다 승패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과의 싸움을 통해 자신감을 얻는다는 것, 그리고 뛰면서 사시사철 변화하는 자연을 체험한다는 것도 어떤 스포츠와 비교될 수 없는 매력이란다. “건강한 육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쿠베르텡 남작의 말에 전적으로 동감할 수 있게 된 것도 남편을 비롯한 주변의 마라톤 마니아들의 건강한 삶을 봐 왔기 때문이다. 결혼 10년을 맞아 남편이 나에게 주고 싶었던 선물은 “건강한 삶”이 아니었을까. 그것은 달리면서 살을 빼라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야말로 건강한 육체를 통해 건강한 정신으로 삶의 질을 높이는 것, 바로 최근들어 사회적인 화두로 떠오른 진정한 웰빙의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다시 결혼기념일이 다가왔다. 이제는 남편의 선물을 기대할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자신을 위해 건강 관리에 신경을 써야겠다고 생각한다. 건강한 아내, 건강한 엄마 만큼 가족들에게 큰 선물도 없다. 건강해야 직장에서도 씩씩하게 소임을 다 할 수 있다. 무엇보다 건강한 삶은 자신에게 주는 가장 소중한 선물이다. 나 자신은 매우 소중한 존재이므로….

김사은<원음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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