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량과 농업문제 인식의 새로운 정치학을 위하여
식량과 농업문제 인식의 새로운 정치학을 위하여
  • 승인 2004.06.08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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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이후 세계는 “경제자유화”와 “시장개방”이라는 소위 신자유주의 이념에 의해 하나의 표준화된 시장으로 통합되고 국민국가 단위의 조정이나 보호장치가 사라지면서 농업을 주로 하는 제3세계 국가들이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작년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WTO) 5차 각료회의 현장에서 한국 농업인 이경해씨가 “세계기구가 농민을 다 죽인다”는 절규와 함께 죽음을 맞이하는 등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저항이 세계 도처에서 계속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현실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농업부문에 있어서 신자유주의 이념은 WTO, IMF, 세계은행 등 국제기구의 표준화된 규범 아래서 초국적 농식품 기업들이 국경을 넘어 자본의 세계적 축적 논리를 관철시키는 근거가 된다. 농업의 세계화는 ConAgra, Delmonte, Cargill 등 초국적 농기업들이 전세계를 시장이자 생산요소 확보 공간으로 인식하여 자유롭게 활동하면서 자신들의 이윤 극대화를 위하여 지구라는 공간을 재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과 칠레의 자유무역협정의 형식은 칠레 정부와 맺는 것이지만, 그 내용은 칠레 농업의 70%를 장악하고 있는 다국적 기업과의 협상인 것이다. 국내에 잘 알려진 ‘Sunkist’나 ‘Delmonte’, ‘Doll’ 등 미국 농민단체나 다국적 기업이 과수시장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소비자들은 많은 양의 태국산 육계를 소비하는데, 태국 양계업자는 ConAgra에서 제공한 병아리에게 아이오아의 옥수수를 주로 한 배합사료를 먹이며, 이 때 양계업자들은 ConAgra가 알선한 금융기관에서 대출을 받아 계사를 짓고 회사가 제공한 표준화된 생산공정을 따라 사육된 닭을 시골에서 올라온 노동자들을 고용해 가공, 처리, 포장하여 일본으로 수출한다. 닭의 국적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볼 문제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농업생산물이 점차 비농업적요소와 결합되어 유전자 조작식품(GMO)으로 대체되는 과정에서 식품안전성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특히, 초국적 기업들은 종자회사, 농약회사, 유통조직 등을 인수, 합병하면서 시장 장악력을 증대시켜 식품산업의 교역자유화와 함께 식품에 내재된 위험요인도 지구화되고 있다. 이것은 비단 광우병이나 조류독감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다. 자연적으로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종들 사이에 유전자가 바뀌어 전혀 새로운 종이 만들어졌을 때, 미처 예측하지 못한 갖가지 부작용이 발생할 소지가 크다.

1996년부터 미국 Monsanto의 유전자 조작 콩이 재배되면서 현재는 시판되고 있는 것이 옥수수, 감자, 토마토 등 11개 품목에 이르며, 우리나라가 가장 많이 수입하는 것이 콩과 옥수수라는 점에서 우리는 GMO 콩과 옥수수에 그대로 노출되어있다고 할 수 있다. 다국적 기업들이 생명공학기술을 응용하여 지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개발한 사례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도 있다. 종자산업 세계2위, 농화학산업 세계 3위인 Monsanto는 자사의 제초제인 “라운드업”에만 저항성을 갖도록 유전자 조작된 “라운드업 레디”라는 콩을 개발하여 제초제와 한 세트로 농민들에게 팔고 있다. 또한 씨앗을 사서 파종한 그 해만 수확할 수 있고 그 다음 해에는 싹이 트지 않도록 유전자를 조작한 “터미네이터(terminator) 기술”, 자사의 특정한 농약이 살포되어야만 싹이 트고 성장할 수 있도록 유전자를 조작한 “트레이터(traitor) 기술” 등이 그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이미 Monsanto, Novartis, Aventis와 같은 농기업들이 진출하여 종자와 농약부문에서 입지를 강화시키고 있다. 몬산토는 금호그룹과 합작으로 금호생명환경과학연구소를 세워 GMO 개발연구를 하고 있고, 노바티스는 서울종묘와 노바티스아그로코리아라는 농화학부문 기업으로 성장하는 등 이미 종자시장의 70%가 다국적 기업에 넘어가 있는 상태이다. 종자주권과 식량안보가 총체적으로 흔들리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렇다고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농식품체제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분리, 도시와 농촌의 분리, 소극적 소비자로서의 대중 등을 전제로 한다. 이런 농식품체제가 갖는 “위험”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고 농산물이 투입되는 화학비료, 살충제, 사료, 생산과정, 그리고 유통과정의 불투명성에서 발생하는 식품안전성의 문제가 제기되면서 대안적인 먹거리 정치가 개입될 수 있는 여지가 발생한다. 최근 웰빙 바람이 불면서 틈새시장으로서 생협활동 등을 통한 유기농식품이 각광을 받고 있는 것도 한 예이다.

우리는 표준화되고 효율적인 시장을 강요하는 그들의 게임 규칙으로 경쟁할 수 없다. 다른 방식의 정치, 즉 생명, 유대, 지역, 참여와 같은 이념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을 짜야한다. 유기농산물을 근거로 한 새로운 먹거리 운동에서 새로운 정치 지형을 찾아 이를 단순한 먹거리운동이 아니라 전방위적인 문화운동으로 확장해갈 때, 초국적 기업이 활보하는 세계화의 구조에 균열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이념을 생산하고 실천하는 정치적 공간은 어떻게 가능한가를 함께 고민하고 찾아가는 것이 우리 농촌을 살리고 우리의 건강한 삶을 영위하는 조건이다.

송정기(전북대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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