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칼럼]우리가 살아가는 이유
[여성칼럼]우리가 살아가는 이유
  • 승인 2004.06.15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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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신동 한동일의 도미 50주년 귀국 연주회에 가기 위해 딸과 함께 나들이를 하였다. 예술의 전당에 이르러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제 4번이 시작되자 딸아이는 서울시향과 연주자의 음악세계에 취해 감격하고 있었다.

  음악이 흐르는 동안 기이하게도 나의 뇌리에는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들이 있었다. 새만금 문제는 어찌 해야할까, 김제 비행장은 어떻게 되나, 골프장 건설은 환경문제와 어떤 연관이 있나, 경전철은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동계올림픽은 할 수 있을지, 방사선 폐기물 처리장은 어떻게 마무리될지 등등 도내문제와 우리나라의 정치적 현안문제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있었다. 음악세계에 흠취하여 열정에 사로잡힌 딸아이의 옆에서 엄마는 그렇게 세파에 젖어 있었다.

  그리고 휴식을 맞이하였다. 그곳에서 정치 대 선배를 만났다. 그리고 악수를 나누었다.

  다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황제가 시작되었다. 연주자는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기 전 팀파니를 지키고있는 아버지를 향해 싸인을 보낸다. 91세의 노부가 팀파니를 해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도 싸인을 보낸다. 아버지는 황제를 연주하는 동안 아들의 연주를 빛내기 위해 내내 열심이시다. 황제의 종반부에 이르러 팀파니와 피아노의 주고받음으로 연주를 마친다. 그리고 두 분은 서로를 향해 달려가 두 팔을 벌려 얼싸 안았다. ‘아버지-, 그리고 내 아들아- ’하는 듯이.

  종반의 연주에서 아버지의 팀파니 연주와 아들의 피아노 협연은 물론 완벽한 연주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최고의 화음으로 다가온다. 온 청중은 일어나 기립박수를 보내기에 충분한 광경이었다. 그것은 아마 두 분이 보내준 협주의 아름다움도 있었겠지만 구십 노순의 아버지와 육순 아들의 호흡, 대지의 숨결과도 같은 화합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아버지와 아들처럼 넓고 깊은 관계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관계이기에 어찌 갈등 또한 없었을 것인가. 우리는 가까운 가족으로부터 상처받고 외로워하기를 얼마든지 경험하게 된다.

  그럼에도 결국 부를 수밖에 없는 그 이름 아버지- 대지의 숨결 같은 아버지- 그리고 대지 그 자체인 어머니를 부를 수밖에 없다.

  가장 가까운 사이이면서도 늘 가장 이해 할 수 없는 사이인 가족처럼 이러한 관계는 필자가 경험하는 정치현장에도 적용된다. 우리는 정치생활을 하면서 당원으로서, 당론 속에서, 정치의 선후배의 관계와 정치적이기 속에서도 이 같은 갈등을 경험하고 용서와 화해를 배우게 된다.

 흔히 말하기를 ‘영원한 적도, 영원한 아군도’ 없다는 이 세계에서도 이렇듯 보이지 않는 도타운 윤리가 쌓여 가는 것이 우리내 세상사이다. 그러하기에 설혹 서로가 조금 서운했어도, 아니 영 보고 싶지 않다가도 또 다시 만나서 악수를 나누며 아쉬워하기를 몇 번이나 해야 하는 것 일까.

  “주님 사랑하는 이웃을 몇 번이나 용서 해 주어야 할까요”라는 제자의 질문에 예수는 답변하신다. “일곱 번씩 일흔 일곱 번을 해야한다.”

 이 숫자는 무한대를 나타내는 상징적인 숫자라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또 하나의 아이러니한 진리를 터득하게 된다. 그러면 포기하면 될걸, 우리는 왜 또 다시 만나서 악수를 해야 하는 지….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살며 사랑하고, 사랑하며 살기 위한 그러한 이유 말이다. 우리는 서로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가운데 화합과 상생의 정치, 통합의 정치를 일구어 갈 수 있다.

김혜숙<전북여성정치발전센터 교육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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