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죽음
  • 승인 2004.06.28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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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神’조차 죽음 앞에 무력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오로지 죽음의 공포에 떠는 유태인들에게 끝내 신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신’에 관한 불경의 또는 모독적 언급이라기보다 죽음의 엄연함을 말해 주는 실존적 거론이고 묵시적 함의라고 함이 옳을 것이다.

 죽음은 그래서 사실로서 오는 것이지 추상적으로 운위되는 가공으로 풀이하고 설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죽음에 대한 애도나 엄숙한 의식은 ‘死者’의 혼령이 가는 여로에 바치는 기원이거니와 그 자체가 죽은 자의 행위가 아니라 남아 있는 자의 몫이 되고 있음도 그런 이유이다.

 따라서 하나의 죽음이 어떤 반향을 불러 일으키는가는 그것에 이르는 과정과 내용이 살아있는 무수한 인간들 사이에 무슨 종류의 메시지를 내느냐에 의해 분분해진다.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폭도들에 의해 하루아침에 시신으로 변한 당당하고 의욕에 넘쳤던 김선일이라는 젊은이의 기억은 많은 스러져간 애틋한 것들 중에서도 특히 커다란 소요를 부르고 있다.

 애도와 추모의 행렬에 참여하는 군중들의 상심과 분노는 야만적 살인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해석되는 의미는 제각기의 지향에 따라 다르다. 이라크 파병을 막아서 다시는 그러한 비극이 재발치 않도록 해야 한다는, 자칫하면 야만행위를 합리화하거나 두둔한 것처럼 오해될 수 있는 사람들도 있고, 그것이 한 사람의 죽음이 아니라 우리나라에 대한 도전이고 훼손이라는 점에서 국가적 자존심을 회복하는 강력한 조치를 요구한 극단의 주장까지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민이란 이유로 희생을 당했고 그것이 목불인견의 잔인하고 가혹한 방법으로 피를 부른 원인인 이상, 섣부른 대응이나 서투른 구호는 국가위신 흠집내기에 이용될 뿐이고 잔악한 자들의 의도에 휘둘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게 뻔하다.

 이라크 파병철회가 저들의 책동이라면 더더군다나 인간의 존엄성을 인질로, 죽임을 수단으로 하는 조건에서는 한치도 용인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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