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다가 지친 후쿠오카의 원혼
울다가 지친 후쿠오카의 원혼
  • 태조로
  • 승인 2004.07.14 21: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후쿠오카를 떠오를때마다 일제에 강제 연행돼 일만 하다가 이국땅에서 숨져간 우리 조상들이 회상된다.

후쿠오카는 산악지대이며 탄광지역이다. 인구 30만 명 정도가 살고 있다. 일제 당시는 화재민이 모여 산을 개발 탄을 캐내 생계를 유지하였고 교통수단이 아주 불편한 곳이기도 하다. 논농사보다도 밭농사가 주를 이루어지고 있을 뿐 탄가루가 바람에 날려 동네 지붕은 항상 검게 물들어 보이는 곳이다. 탄가루가 바람에 날려 세탁물도 자주 빨아야 하고 먹는 생수도 끓여 먹지 않으면 안 된다. 병원 의사가 부족한 곳이기에 의료혜택이 없어 결핵질병에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은 농촌 생활의 일상이다.

1942년부터 1945년 해방되기 전까지 일제 강제 연행 노무자 동원 수는 70만 1천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일본을 지상낙원으로 소개하고 친일파를 동원시켜 강제연행을 지속으로 추진해 왔다고 한다. 생계가 어렵고 살기 힘든 자를 골라서 접근 유인하는 방법으로 강제 동원된 자를 모아놓고 일본에 오면 잘 살게 해 주마, 밥도 배불리 먹고 옷도 좋은 옷, 사는 집도 좋은 집을 마련해 준다는 거짓 술수에 빠져들어 젊은 층이 희생양이 되었다고 한다.

후쿠오카로 끌려온 노무자는 성분을 분석하여 인근 탄광지역 농촌으로 갈라 배치하는 수법을 이용하였다.

사무라이 정신으로 무장케 하고 매일 학습으로 성분을 분석하고 잘못된 성분분석에 매질하고 탄광감독관 일본인 감시에 살아가는 한국인들은 가슴 아픈 눈물의 세월 속에 살아가는 희생양이 되어 버렸다. 배고파 죽고 병들어 죽고 힘없으면 강제 총살당하는 참 비극적 장면은 수없이 많았다고 한다.

살기 위해서는 일본사람들에게 잘 보이는 쪽으로 방법을 선택하는 길이었다고 한다. 일본사람의 눈에 잘 들면 겉으로는 최고의 대우를 하는 것처럼 속이는 술책이었다. 모범적으로 열심히 일하고 있는 한국인을 뽑아서 상을 내리고 조건을 붙여 한국에 있는 부인을 데려 오도록 강요하는 방법도 있다고 한다.

일본의 속셈은 노무자를 다른 곳으로 도망 못가는 방법을 이용하게 되었다. 처음엔 한국에서 온 부인을 대우해 주고 좋은 집에 살도록 마련해 주기도 하지만 나중에 가서는 갈라놓고 일만 하도록 하였다.

억울하게 끌려온 한국인 강제 노무자는 탄광이 무너져 흙더미 속에 파묻혀 죽게 되고 탄 가스에 질식되어 억울한 운명으로 숨진자들이 많았다.

육신은 살아있다고 하지만 정신적 고통 속에서 매일 무서운 공포증에 인생을 살게 되는 강제 연행자의 눈물은 태평양 바다를 이루고만 슬픈 삶 그 누가 안단 말인가

후쿠오카 부근에 보이는 것을 인공산이 수십 개 눈에 띄게 된다. 인공산의 높이는 1200m 길이는 400m 정도로 우뚝서서 곧 삼킬 것만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일제 당시 강제로 끌려온 (원흉의 숨결로 탄광에서 파낸 흙, 돌, 잡것) 희생양의 땀과 눈물, 피의 대가의 산이 지금은 인공산으로 변해 버렸다.

작금의 일본 양심가들은 그 당시의 실상을 본 산 증언자들이다. 일제 당시의 강제 연행자들과 함께 생활하고 감독관으로 재직한 자들이 이젠 양심선언으로 민간단체를 만들어 과거사 사죄 청산운동에 앞장서서 외치고 있다.

이들은 한결같이 본인 부담으로 일제 강제 연행 희생자의 추모비 또는 납골 보존 건축 건립과 일본의 죄의 실상을 알리는 일이다. 강제 연행자의 노무자 재판, 일본 정부와 투쟁하는 일, 납골당 건립, 보상 추진 지속 등 여기 저기서 휘몰아치고 있다.

장비를 동원하여 납골을 한국으로 후송하는 일, 이외에도 많은 일들을 추진하고 있다.

이젠 이국땅에서 떠돌고 있는 원혼을 달래기 위한 작업들이 한국 정부와 한국측 민간단체의 적극적인 주도로 이뤄지기를 바랄뿐이다.

홍순환<태평양전쟁희생자 유족회 전북도지부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