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노벨상엔 수학이 없는가(1)
왜 노벨상엔 수학이 없는가(1)
  • 승인 2004.07.26 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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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노벨(Alfred Nobel, 1833-1896)은 스웨덴 출신이지만, 생애의 대부분을 프랑스를 위시하며 유럽 지역 내의 외국에서 보냈다. 따라서, 노벨의 사생활이나 유언에 대한 해석도 그가 살았던 나라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다. 프랑스와 미국인들에 의하면, 노벨이 그의 유언에 노벨 수학상을 포함하지 않는 것은 그가 당대의 유명한 수학자인 미타그레플러(Magnus Go"sta Mittag-Leffler, 1846-1927)와 한 여인을 사이에 두고 삼각관계에 있었던 것에 기인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스웨덴 측에서는 만일 노벨 수학상이 있었다면 그 당시 스웨덴의 대표적인 수학자였던 미타그레플러가 한림원으로 하여금 자기를 첫 수상자로 선정하게끔 영향력을 행사하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첫 수상자가 되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긴 이유는 자신의 연적이어서가 아니라 미타그레플러 때문에 보다 우수한 다른 수학자들이 불이익을 당할 것을 우려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노벨과 관련하여 세인의 입에 지금까지 오르내리고 있는 미타그레플러는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스웨덴의 최고 수학 권위자로 알려져 있으며, 왕성한 학회 활동으로 스웨덴을 비롯한 유럽 학회에서 주목을 받았던 인물이다.

  그가 창간한 수학동향(Acta Mathematica)지는 1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수학계에서는 가장 권위 있는 학술지로 불려지고 있으며, 소냐 코발레브스카야(Sonya Kovalevskaya)라는 여성을 유명한 수학자로 키우는데 큰 역할을 했으며, 지금의 스톡홀름 대학으로 발전한 스톡홀름 호그스콜라(Stockholm's Hogskola)의 원장을 지냈다. 이처럼 화려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만일 노벨 수학상이 존재했다면 미타그레플러가 과연 첫 수상자로 지목될 수 있었을 지는 장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유럽에는 이미 학문적으로 그를 앞선 뽀앙카레(H. Poincara, 1854-1912)와 힐버트(David Hilbert)등의 수학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스웨덴 학계에 로비를 가한다면 수상이 가능할 수도 있었을 것이나 그럴 경우 세계 최고를 지향하는 노벨상의 취지에 위배되었을 것인즉, 아마도 노벨이 미타그레플러를 의식했다면 다름 아닌 이와 같은 이유였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한편에서는 수학이 노벨상에서 제외된 것은 단순히 수학에 대한 노벨의 관심 부족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는 노벨의 유언을 집행하고 후에 노벨 재단의 책임자가 된 레그나 솔맨(Ragnar Sohlman)이 제공한 자료에 근거한 해석이다. 노벨은 인류의 행복에 기여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을 제정하여 매년 그의 유산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상금을 주도록 유언하였다. 그 상은 물리, 화학, 의학, 문학, 그리고 평화의 다섯 분야에 주어졌는데, 이들은 모두 노벨이 생전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분야였다. 그 중 물리와 화학은 노벨 자신의 직업과 깊은 연관이 있었고 문학은 평소 노벨의 문학에 대한 조예를 반영하는 것이었으며, 평화상은 그의 이상주의와 무기를 버려라 라는 책의 저자인 베르타 폰 슈트너와의 우정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발명가이자 기술자였던 노벨은 과학상 수상 대상자는 반드시 발명이나 발견을 통해 실질적인 인류 복지에 기여한 자라야 된다고 명시하였는데, 그 당시 학문의 성격상 이론 위주인 수학을 실용성 있는 분야가 아닌 것으로 간주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물리 분야만 보더라도 이론보다는 실험 분야에서 많은 수상자를 배출해 왔다. 이밖에도 노벨과 미타그레플러의 관계가 노벨 수학사의 부재와 무관하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여러 가지 설명들이 있다. 노벨은 스웨덴 한림원의 멤버였지만 스웨덴의 학자 사회와는 별로 교류가 없었던 사람이다. 그는 성 페테르스부르그에서 학교를 다녔고, 1863년 이후로는 거의 스웨덴을 떠나 있었다. 그리고 1870년 중반에는 파리에 정착해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미타그레플러와 접촉이 거의 없었을 것이며 둘 사이에 어떠한 적대 감정이 존재했으리라고는 추측하기 어렵다. 오히려 미타그레플러는 노벨이 사망하기 몇 해 전부터 노벨 재산의 상당 몫을 금으로 유치할 것을 추진해 왔다고 알려지고 있는데, 만일 두 사람 사이에 응어리가 있었다면 이것이 가능했을까.

<전북대 수리통계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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