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 유감
한글날 유감
  • 태조로
  • 승인 2004.10.08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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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도 어김없이 한글날이 찾아왔다. 우리말을 연구하고 가르치며 그것으로 호구지책을 삼고 있는 사람으로서 한글날을 맞는 감회가 남다른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한글날을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는 것은 왜일까?

 올 한글날은 세종 대왕이 한글을 반포한 지 558돌이 되는 날이자 제79회 한글날이다. 한글이 창제된 것은 세종 25년 12월(흔히 1443년으로 알려졌으나 그것은 연도만 얘기한 것으로 양력으로 환산하면 정확하게 1444년 1월이 맞다)이지만 한글날은 그것이 반포된 세종 28년 9월, 즉 1446년의 10월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558돌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정식으로 한글의 반포를 기념하기 시작한 것은 일제시대인 1926년부터였다. 우리말 연구의 선구자였던 주시경 선생의 제자들이 모여서 만든 조선어학회에서 한글 반포로부터 8갑자가 지난 1926년을 제1회 한글날로 정하고 기념하였던 것이다. 당시에는 기념일 명칭도 한글날이 아니고 ‘가갸날’이었으며 날짜도 오늘날처럼 양력 10월 9일이 아니라 음력 9월 29일이었다. 당시에는 민간단체의 소규모 기념행사였다. 나라가 없어 일본어가 국어로 인정받던 시대였으니 그 슬픔은 아마 더욱 컸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던 것이 1928년에 명칭이 한글날로 바뀌고 1945년에 10월 9일로 정해졌으며 이듬해인 1946년에 한글 반포 500 돌을 맞이하여 국경일로 정해 국가적으로 공식적인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그러다가 공휴일 축소 방침에 따라 1991년부터는 단순한 기념일로 축소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한글날 기념의 역사는 마치 한글 자체의 기구한 역사적 변천을 반영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착잡하다. 훈민정음을 세종이 반포한 그 당시를 생각해보자. 한자만이 유일하게 문자로 대접받던 당시 상황에 비춰볼 때 훈민정음의 창제는 정말 혁명적인 것이었다. 이는 새로운 문자, 우리말에 맞는 우리글의 필요성에 기인한 것이었으나 그 저변에는 우리말에 대한 자긍심과 관심, 사랑이 자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후 오랫동안 훈민정음은 온갖 탄압을 받으며 ‘언문, 암글, 반절’ 등으로 불리는 수난을 당했다.

 또 주시경 선생이 ‘한글’을 연구하고 그 제자들이 ‘가갸날’을 만들던 시절을 생각해보자. 우리말을 연구하는 것조차 제한받던 그 때에 우리말을 연구하고 나아가 기념일을 만든 것은 우리 민족의 생각과 문화를 지켜내는데 우리말이나 우리글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나라가 없던 그 시대의 사람들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광복하자마자 국경일로 정하고 경축한 것 아닐까?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그 중요성이 소홀히 되는 것 같아 아쉽다. 공휴일에서 제외되고 단순한 기념일로 축소된 것이 마치 오늘날 우리말과 우리글을 홀대하는 세태를 반영한 듯하여 씁쓸하다.

 주위를 보면 오늘이 한글날인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외국어를 섞어 쓰지 않으면 말이 안 되고, 국어만 사용하면 시대에 뒤떨어지는 사람처럼 생각한다. 상품 이름, 가게 이름은 말할 것도 없고 요즘 최첨단이라고 하는 산업들조차 IT산업, BT산업 등 그 명칭부터 혼란스럽다.

 오히려 한글의 훌륭함은 외국에서 더 잘 알려져 있다. 훈민정음은 남대문이나 석굴암, 고려청자처럼 국보 7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한글은 이미 1997년에 유엔 산하 교육 과학 문화 기구인 유네스코에서 ‘세계가 보호해야 할 문화유산’으로 지정받은 자랑스러운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인 것이다. 신문이나 방송 매체를 통하여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알바니아 대사가 ‘알바니아어-한국어 사전’을 만들기에 신명을 바치고 아프리카의 케냐 서부 사막에 사는 포콧 족의 청년 카마마가 한글로 쓴 편지를 보면서 괜히 자랑스러운 기분이 든 적도 있었다. 국제적인 과학 전문 학술잡지인 ‘디스커버’지도 오래 전에 이미 한글의 과학성과 독창성을 규명한 바 있다. 문자로서 이렇게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은 아마 한글이 유일하리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렇게 인정받는 우리말과 우리글을 우리가 다듬지 않는다면 누가 할 수 있을까? 어느 연구 기관의 발표를 보면 앞으로 반세기가 지나기 전에 세계의 거의 대부분 언어가 소멸될 것이고 우리말도 거기에 포함된다고 한다. 그런 일이 정말 눈앞에 닥친다면 그것은 단순히 우리말을 잃는 것일 뿐 아니라 우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도 함께 잃게 될 것이다. 두렵고 안타까울 뿐이다. 한글날에 유감보다 오로지 기쁨만 느낄 수 있는 그 때가 빨리 오기를 기대해본다.

윤석민<전북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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