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원적학자, 원적환자인가?
왜 원적학자, 원적환자인가?
  • 승인 2004.11.01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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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에 학자들은 요즘처럼 바쁘지 않아서 한가함을 즐기고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공부하였다. 그 결과는 수 세기 또는 수십 세기 후에 과학발달의 원천이 되는 일이 종종 있다.

  3700년 전 고대 그리스에서 생각한 문제인 원적문제도 그 중 하나이다. 원적문제란 원과 면적이 똑 같은 정 사각형을 그릴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이다. 물론 원적문제의 해결도 임의 각을 삼등분 할 수 있느냐는 문제에서처럼 눈금이 없는 자와 컴퍼스만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원과 면적이 같은 정사각형에 대한 최초의 언급은 이집트의 린드 파피루스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린드 파피루스는 원적문제에 대한 답을 이렇게 제시하고 있다. 그는 원의 면적과 같은 정사각형은 원의 반지름의 (16/9)배를 정사각형의 한 변으로 하면 된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대로 계산해 보면 원과 정사각형의 면적은 엇비슷하지만 이 둘의 면적이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다. 그러므로 왜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가라는 궁금증이 이는 것은 당연하다. 더구나 고대 그리스의 학자들은 한 번 의구심이 생긴 것을 풀지 않고서는 도저히 편안한 잠자리에 들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원적문제에 매료당한 고대그리스 수학자들은 완벽한 답을 찾기 위하여 노력했다. 그것도 수치적인 계산이 아닌 눈금 없는 자와 컴퍼스만을 이용한 도형적인 방법으로만 해결하기 위하여 내로라하는 그리스의 대 학자들이 원적문제에 매달렸다. 그리고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아이디어를 총 동원하여 도형을 그려보고 또 그려보며 작도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으로 가는 길은 좀처럼 명확한 모습을 드러내 보이지 않았고 수 세기를 걸쳐 원적문제는 잠시도 수학자들의 관심권 밖에 밀려나지 않았다. 수학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큰 매력 있는 문제란 쉽게 해결되는 문제보다는 어느 누구도 문제에 대한 가능과 불가능에 대한 해답을 못 주는 문제에 대한 명확한 결론이나 증명이 없는 문제에 대한 도전이다. 그런데 원적문제는 거의 2000년 동안 어느 누구도 감히 이 문제의 해답에 가까이 접근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언뜻 생각하면 하찮은 것 같지만 이와 같이 수십 세기 동안 풀리지 않는 숙제는 도처에 산재해 있고, 이런 문제를 해결하면 순식간에 그는 세계적인 대 스타가 되는 것이다.

  하여튼 원적문제에 결론을 얻은 것은 원적문제를 기하학적으로 해결하고자 했던 노력이 시도된 지 근 2000년이 흐른 19세기에 들어와서다. 독일의 수학자인 린데만(Lindemann, 1852-1939)이 원적문제는 눈금 없는 자와 컴퍼스만으로는 해결이 가능치 않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다. 그는 눈금 없는 자와 컴퍼스만으로 그릴 수 있는 것은 유리수(분수로 나타낼 수 있는 수)일 때뿐이다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원의 원주율(3.14159…)인 파이는 어떤 방법으로도 유리수가 될 수 없는 수(무리수)이다. 그러한 수를 초월수라 하는데 원주율은 원적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초월수였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고대 그리스 시대 이후로 수학자들의 머리를 한시도 편안치 못하게 만든 원적문제가 산뜻한 결말을 보게 된다. 후세 사람들은 눈금 없는 자와 컴퍼스만을 들고 원적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사람들을 가리켜 원적학자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 용어는 시간이 흐를수록 변질되어 원적환자라는 좋지 않은 뜻으로 변했다. 다시 말하면 수학적 지식이 부족하면서도 무작정 이렇게 하면 되겠지 하는 마음과 선입견만으로 종이와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원적환자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날에도 정확한 지식도 갖추지 않고 어려운 문제를 풀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나 확실한 이론으로 무장되어 있지 않으면서 자기 말이 무조건 옳다고 허풍을 떠는 사람들을 빗대어서 원적학자나 원적환자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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