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설 금병매 <273>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떨리고
평설 금병매 <273>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떨리고
  • <최정주 글>
  • 승인 2005.01.21 17: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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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옥향의 반란 <29>

오늘 낮에만해도 열두 번도 더 아씨한테 오고 싶었습니다만, 제 목숨도 소중하구만요.”

태국이 놈이 울상을 지었다.

“조심하면 된다. 설마 내가 널 죽게야 하겠느냐? 아버님이 한번 잠이 드시면 잠귀가 어두우시느니라. 코고는 소리가 나면 틀림없이 잠이 드신 것이니. 걱정말고 내게 오너라.”

“알겠구만요, 아씨.”

태국이 놈이 가마솥에 데워진 물을 한 통 목간통에 옮겨 부어놓고 장작을 한 아름 더 아궁이에 지피고 부엌을 나갔다. 옥향은 태국이 놈의 넓은 등짝에 대고 내 등 좀 밀어줘, 라는 말이 나오려는 걸 꾹 참았다. 아직은 때가 아닌 것이었다. 초저녁 잠이 많은 찬모가 잠이 들고, 자정이 넘어서야 잠자리에 드는 아버지가 잠이 들고나야 비로소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었다.

땅거미가 별당마당으로 슬슬 기어들어올 때 옥향이 목간통에 몸을 담그고 있는데 밖에서 철비의 기침소리가 들렸다.

“아버님, 저 여기에 있어요. 어찌 오셨어요?”

옥향이 물 한 바가지를 어깨에 좍좍 끼얹으며 물었다.

“목간에 있었느냐? 문은 잘 걸었겠지?”

“그럼요. 단단히 걸었어요.”

“방문단속도 잘 하거라. 무슨 일이 있으면 비상줄을 잡아당기고.”

비상줄은 미앙생이 떠난 며칠 후에 철비가 태국이 놈을 시켜 설치한 것으로 길다란 줄을 옥향의 방과 철비의 방에 연결해 놓고 그 끝에 풍경을 달아 놓은 것으로, 옥향의 방에서 잡아 당기면 철비의 방에서 풍경이 울리고, 철비의 방에서 잡아당기면 옥향의 방에서 풍경이 울리도록 해놓은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철비가 옥향을 안채로 불러들일 때 주로 사용했었다.

“예, 아버님. 제 걱정은 마시고 푹 주무세요. 시회에 다녀오시느라 피곤하실텐데요.”

옥향이 속으로 빙그레 웃었다. 아버지가 별당까지 나온 것은 저녁에는 일찍 잠자리에 들겠다는 뜻이었다. 어제는 시회를 하느라 과음을 했을 것이고, 집에 두고 온 딸이 걱정이 되어 새벽에는 또 채 술이 덜 깬 몸으로 부랴부랴 출발을 했을 판이었다. 심신이 많이 지쳐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평소 늦게까지 잠을 못 이루는 딸의 습성을 알고 있는 아버지가 땅거미가 채 자리도 잡기 전에 별당에 들려 문단속을 당부하는 것은 쏟아지는 잠을 어쩌지 못해서였을 것이었다. 아버지가 일찍 잠이 들면 들수록 태국이 놈이 빨리 찾아 올 수 있으니,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떨리고 아랫도리가 후꾼거릴 일이었다.

“흐음.”

철비가 헛기침 소리를 남기고 돌아 간 다음 옥향은 몸을 마저 씻고 목간을 나왔다. 달이 떠오르려는지 동산너머가 황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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