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남기 한국언론재단 이사장
정남기 한국언론재단 이사장
  • 서울=강성주기자
  • 승인 2005.01.31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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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론 환경이 급속히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중책을 맡아 어깨가 무겁습니다. 앞으로 신문과 방송 관련 법을 수정.보완하는데 적극 나서 재단 위상을 재정립하고, 나아가서는 언론 발전에 기여하고 싶습니다.”

 지난 19일 새로 부임한 전북 고창 아산 출신의 정남기(62) 제4대 한국언론재단 이사장이 밝힌 첫 포부다. 정 이사장은 1970년 현대경제일보에 입사하면서 언론계에 첫 발을 내디딘 이후 줄곧 언론 발전을 위해 헌신하고, 동학농민혁명사업을 위해서도 동분서주하면서 열심히 살아왔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그의 험난한 인생 역정과 하고 싶어하는 일들을 들어 본다. 

 -한국언론재단 이사장으로 부임하시고 난 후, 정 이사장님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다시 쏠리고 있습니다. 먼저 자신에 대해 소개해 주십시요.

 ▲우여곡절이 많았던 언론계를 떠난지 2년이 지났습니다. 연합뉴스에서 정년 퇴임을 한 뒤 내 고장의 자랑인 동학농민혁명사업에 매달리다시피 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유족회 회장과 동학농민 명예회복 심의위원을 함께 떠맡아 지난해 3월 제정 공포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과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을 출범시키느라 매우 바쁜 나날을 보냈지요. 그러나 동학농민 명예회복심의위원으로 참여한 민간인 8명 가운데 혁명의 본 고장인 전북 출신 위원이 제 자신 1명 밖에 없고, 경상도 출신들이 주류를 이뤄 아쉬움이 많았습니다. 이 때문에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들의 명예 회복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한 점도 있습니다. 지난해 3월 발족한 동락농민혁명기념재단에는 신 건 전 국정원장을 비롯한 중앙 유명인사 및 지역 인사 20여명과 유족들이 참여하고 있으며,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사무실을 마련해 운영하고 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사업 관련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정.관계 인사들을 열심히 쫓아 다니면서 설득과 촉구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언론을 개혁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맡게 됐습니다.

 -정 이사장님이 1980년 5월 기자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을 당시 신군부 세력의 언론 검열 등 각종 횡포에 맞서 항거하다가 강제 해직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이후 언론사에 복직할 때까지 고통이 이루헤아릴 수 없으셨으리라고 봅니다. 해직 전 언론 민주화 활동 과정에서 얻은 것과 해직 기간을 어떻게 보내셨는지 궁금합니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기협 부회장 선거에서 당선돼 언론 민주화운동에 적극 뛰어들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해직되는 바람에 간절히 바랬던 목표를 이루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억압된 부분을 풀고 민주언론으로 가기 위해 언론계의 자정을 결의하고, 분회비도 따로 받는 등 나름대로 성과도 있었습니다. 당시 기자협회가 어용단체와 비슷해 바로잡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활동했습니다. 1980년도 신군부가 일어나고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언론 억압이 심해져 김태홍 당시 기협회장과 함께 신문 제작 거부 등 언론 반민주화 정부에 정면으로 맞서는데 중심 역할을 한 것이 사실 입니다. 그 때 처음에는 신문 제작 거부 의사를 묻는 투표에서 반대 표가 절반 이상을 차지했으나, 제가 광주사태와 더불어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기협 회원들을 설득, 다시 표결을 통해 찬성 쪽으로 가결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해 5월20일 신문 제작 거부를 결행했습니다. 그 후 기협은 초토화됐고, 언론 동지들 가운데 옥 살이를 하거나 고문을 받은 사람이 많습니다. 신문 제작 거부를 주동한 동지들은 모두 해직됐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봐도 그 당시 결단은 자부심으로 남아 있습니다. 제작 거부의 날짜가 ‘기자의 날’로 지정돼 매년 기념하고 있는 것도 자랑스럽습니다. 당시 제작 거부 사태가 특별법으로 제정될만한 충분한 요건이 되는데 민주화법에 모두 포함돼버려 아쉽습니다. 이는 기자 정신으로서 영원히 기록되고 남아야 할 역사 입니다. 필봉을 꺾고 투쟁한 사례가 그 이전에도 없었고, 그 이후로도 없습니다. 언론 후배들에게 물려줘야 할 자산이기도 합니다. 언론사 해직 후에는 먹고 살 길이 막막했습니다. 취업에 제한을 받아 선.후배들도 찾아가지 못했습니다. 할 일 없이 이리저리 헤메이다가 결국 서울 정릉에서 구멍가게를 꾸렸습니다. 남에게 피해 안주고 살아 갈 길이 무엇인지 고민하다가 결정한 것입니다. 2년 반 동안 가게에서 번 돈으로 생활하다가 전자시보(현 전자신문)에 입사해 5년 동안 박봉으로 고생하면서 근무했습니다. 결국 폐결핵을 앓아 전남 무안군 삼양면에 소재한 요양원에서 1년여 동안 몸을 추스렸습니다. 함께 요양 생활을 하던 언론인들을 중심으로 ‘폐결핵 동지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운영도 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독서를 하면서 제 인생에 충전을 하기도 했습니다.

 -정 이사장님이 추진할 역점 사업은 무엇입니까.

 ▲재단 위상이 위축되지 않도록 현재 마련중인 신문법령에 재단 입장을 확고히 반영시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신문법을 수정.보완토록 하는 등 재단을 활성화시키는 방법을 모색하겠습니다. 언론매체의 전성시대가 과거 신문에서 지금은 방송으로, 머지않아 제3의 매체가 떠오를 것이 분명합니다. 신문과 전파방송이 얼마나 지속될지 모르는 만큼 언론재단은 미디어산업의 변화를 예상해 제시할 수 있도록 열심히 연구ㅡ할 의무가 있습니다. 학술적으로나 실질적인 지원책도 강구해 나갈 것입니다. 언론 종사자들의 정신 변화도 도모해야 합니다. 새로운 언론 풍토를 만들어 나가겠습니다. 언론인들의 사명감을 되살릴 수 있도록 가교 역할도 하겠습니다. 정부 대신 선진 언론환경 조성 역할을 충실히 해나가겠습니다.

 -동학농민혁명유족회 회장을 겸임하고 계신데, 앞으로 하시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유족 발굴, 동학농민 명예회복, 기념 사업 등 3가지를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싶습니다. 근.현대 학자들은 가장 위대한 인물이 전봉준이라고 서슴없이 말합니다. 그 만큼 이순신 장군, 김 구 선생 등 누구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은 역사적 인물입니다. 선진국들은 역사적인 존경 인물을 선정하는데 있어서 구국을 위해 민중 횃불을 든 사람을 가장 높이 평가합니다. 동학혁명이 제대로 평가받는다면 전봉준 선생은 애국자.전술가.근대 문물의 문을 연 선각자로 우뚝 설 것입니다.  

 프로필

 △43년 고창 아산 출생 △62년 고창고 졸 △68년 동국대 경제학과 졸 △70년 현대경제일보 기자 △72∼80년 합동통신 기자 △83년 전자시보 편집국장 △88년 연합통신 복직 △2000년 연합뉴스 민족뉴스취재본부장 △2001∼2003년 연합뉴스 동북아정보문화센터 상임이사 겸 소장 △2003년 동학농민혁명유족회 회장(현) △2004년 한국편집미디어협회 부회장(현) △2005년 한국언론재단 이사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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