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운동정신의 본류
3·1절 운동정신의 본류
  • 승인 2005.02.27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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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강점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세계에 민족의 자주 독립을 선언하고 온민족이 전개한 독립운동정신을 기리는 3.1절이다. 비무장 저항운동으로 평화롭게 시위운동을 전개하였지만 일제의 총칼 앞에 무참히 짓밟혀야 했다. 그러나 고귀한 정신은 오늘까지도 생생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그 숭고한 온국민의 3.1운동정신의 본류는 무엇이었을까?

 사회·경제·정치적으로 어려웠던 조선 말, 일본은 군사력으로 한반도를 강점하기 훨씬 전부터 경제적으로 우리 나라를 침략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의 경제력은 농촌사회 깊숙이 파고들어 우리 민족의 생존권을 위협하기 시작하였다. 1894년(갑오년) 음력 3월, 동학농민혁명군은 일본의 경제수탈과 연결된 지방 관속들의 부정부패를 척결하기 위해 1차 동학농민혁명을 전개하였다. 이를 계기로 일본은 같은 해 음력 5월(양력 6월), 한반도에 군사력을 침투시켜 경복궁을 강제점령하는 등 침략의 기세를 드러내자, 동학농민혁명군은 일본의 침탈에 항거하여 음력 9월에 분연히 2차 동학농민혁명을 전개하였다. 전북 고부(현재 정읍)에서 시작한 동학농민군의 세력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뒤, 같은 해 음력 11월 공주 우금티 들판에 집결한 동학농민혁명군의 주력부대는 일본군과 조선관군의 연합군에 맞서 혁명전투를 벌였으나, 우수한 무기를 갖추고 훈련받은 연합군에게 눈이 덮인 산야에 선혈을 물들이며 처참하게 패배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일제의 총칼 앞에 좌절하지 않고, 1895년에는 을미의병활동에, 일제 강점시대에는 3.1운동과 만주지역의 독립운동 등 항일의병활동에 다시 참여하였다.

 당시 조선정부는 일제의 강압으로 100여만 명의 농민이 참여한 동학농민군의 혁명활동을 반란으로 규정하고 탄압하여, 수십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하게 하였다. 동학농민군들은 참살을 모면하기 위해 국내외로 흩어져 이름과 성을 바꾸고 살아갔으며, 참여자와 그 유족은 혁명에 참여한 사실을 감추기에 급급했고, 작성된 몇몇 혁명관계 자료마저 파기하였다. 111년이 지난 지금, 동학농민혁명운동 전개 당시의 구체적인 참여자의 명단과 활동과정을 밝혀내는 일이 요원하다. 1920년대 조선사편수회의 자료정리에서도, 1980년대 이후 20여 년간의 관계학자들의 연구에서도 당시 동학농민군의 혁명활동과 참여자규모를 구체적으로 밝혀내지 못했다. 일부 자료에서 지도자급 몇몇 사람의 이름이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 동학농민군의 활동에 대해 정확하고 구체적인 역사적 규명을 위해서는 우리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

 동학농민혁명은 기억하기 쉽지 않은 농민(민중)의 사회개혁을 위한 시민운동의 역사이며, 나라를 지키기 위한 독립운동의 역사다. 외세 침략을 물리치고 자주국가를 이루려는 애국애족 정신과 봉건사회의 폐정을 혁신하여 평등·대동세상을 구현하고자 했던 개혁(혁신)정신은 항일의병활동, 3.1운동, 임시정부 수립, 4.19혁명, 5.18광주민주화운동 등 민족의 독립정신과 민주사회의 시민정신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살펴볼 때, 3.1운동의 숭고한 정신의 본류는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이라 할 수 있다.

 그동안 우리는 동학농민혁명군의 정신이 일제강점하의 항일독립군들의, 민주사회의 시민운동가들의 정신적 본령이라고 차마 말하지 못했다.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이 제정됨으로써 과거에 옥죄었던 '반란'이 이제는 떳떳한 ‘혁명’으로 명예회복이 되었다. 이제는 3.1운동 정신과 함께 이들의 정신을 올곧게 계승하여야 한다.

원태섭<동학농민혁명명예회복심의위원회 행정사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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