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왕궁리 유적
익산 왕궁리 유적
  • 익산=이승준기자
  • 승인 2005.03.03 1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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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김용민)가 최근 백제문화권 중장기 유적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추진하고 있는 익산 왕궁리 유적(사적 제408호)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백제 무왕대에 조영된 것으로 추정되는 왕궁성의 내부구조를 확인하고 왕궁사명 기와 및 각종 토기류, 금귀공품, 중국청자편 등 관련 자료가 쏟아져 나와 문화 및 사가들의 관심은 물론 방문객들의 발길이 잇따르고 있다.

 특히 고대 궁성의 구조와 변천과정 연구에 도움이 되는 고고자료와 1천여점의 유물을 수습하는 성과를 거둬 역사교육의 장으로도 큰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익산 왕궁리 유적은 백제 30대 무왕(A.D.600∼641년)의 익산지역 경영계획에 의해 조성된 고대의 궁성유적으로 남북길이 490m, 동서너비 240여m에 이르는 장방형 성벽으로 구획되어 있다.

 이곳은 지난 1989년부터 현재까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 의해 연차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으며 그 동안 조사에서 왕궁리오층석탑(국보 제289호)과 관련한 금당지, 강당지 등 통일신라시대 사찰유구와 백제시대의 성벽, 석축, 건물지, 공방지 등 다양한 궁성관련 유구가 확인되었고 대관관사, 수부명 인장와, 연화문와당, 각종 토기 및 중국자기류 등 3천여점의 유물이 출토되기도 했다.

 지난해 3월부터 본격적으로 실시된 오층석탑 주변지역에 대한 정밀발굴조사에서는 왕궁성의 내부구조를 자세히 확인할 수 있었으며 특히, 왕궁성내의 남쪽지역은 계획적으로 대지의 비율이 2:1:2:1의 일정한 비율로 나누어지도록 동서방향의 석축을 4곳에 쌓아 넓은 계단상의 대지를 조성했음이 특징으로 나타나 있다.

 서북편지역에 대한 정밀조사에서는 동서로 길게 설치된 석축배수로와 서성벽 아래로 이어진 암거시설이 양호한 상태로 확인돼 새로운 역사의 장으로 기대하고 있으며 백제시대의 화장실로 파악되는 대형수혈도 모두 3기가 조사돼 눈길을 모으고 있다.

 수혈은 길이 10m 내·외, 너비1.8m 내·외, 깊이 3.4m 정도의 깊은 구덩이를 파내고 내부에 직경10㎝전후의 나무기둥을 일정한 간격으로 설치하였으며 이가운데 1호 수혈내에서는 다량의 기생충란(회충,편충,간흡충 등)이 토양분석 결과 확인됐으며 용변 후 뒤처리시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길이 20㎝내·외의 나무막대 50여점이 출토돼 고대의 화장실일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그 동안 국내에서 발굴조사된 유족에서 기생충란이 발견된 예는 광주 신창동유적, 대구 칠곡 등에서 소량 발견된 바는 있으나 왕궁리 유적과 같이 다량의 기생충란과 화장실유구가 구체적으로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어서 삼국시대 화장실의 형태와 함께 당시 사람들의 병리학 및 실생활 관련 정보자료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고있다.

 공방지와 관련된 폐기장에서는 도가니편과 정교하게 가공된 금못, 금사, 유리파편 등 삼국시대 귀금속과 관련된 각종 공예품의 제작과정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유물이 다량 출토됐다. 결국 왕궁성의 서북편지역은 궁성내부의 공간구획상 공방지 등의 작업장이 넓게 분포됐던 곳으로 추정되며 궁성에서 필요한 각종 소모품을 생산, 조달하던 곳으로 파악돼 새로운 역사의 장으로 부각되고 있다.

 -왕궁리 5층석탑(국보 제289호)

 이 석탑은 왕궁평성 중앙의 대지위에 자리하고 있어 일반적으로 ‘왕궁탑’이라고 부르고 있다. 높이 8.5m의 장중한 탑으로 1965년 해체보수되기 전까지만해도 토단을 갖춘 희귀한 석탑으로 알려져 있었으나 해체복원 결과 원래 돌로 기단을 구성하였음이 밝혀져 이를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이 탑의 기단부는 기단 면석의 각 면이 2개의 탱주와 우주가 조각된 3매의 돌로 깍아 맞추었으며 하대 갑석 또한 1면을 3매의 돌로 쌓았다. 탑신부는 초층 몸돌은 각면의 중앙에 1개의 탱주와 모서리에 우주를 조각하였으며 전부 8개의 돌로 이루어졌다.

 지붕돌은 층급 받침이 3단인데 지붕과는 별도로 4매의 돌로 조성해 그위에 평평한 모습의 지붕돌을 얹었으며 네 귀에서 가볍게 들리어 있어 전형적인 백제계의 석탑으로 사학계는 보고있다.

 현재 상륜부에는 노반, 복발, 앙화, 부서진 보륜 1개가 남아 있다. 1965년 해체 보수 중 제1층 지붕돌의 중앙과 심초석에서 각각 사리장엄구가 발견됐다.

 지붕돌에 사리장엄구를 장치한 석재는 백제시대 주춧돌로 사용한 석재로 좌우 두곳에 4각형의 홈을 만들어 뚜껑이 있는 금동제 함을 각각 장치했다. 동쪽 금동제 함 속에는 금뚜껑의 네모꼴 함이 들어 있고 그 안에는 다시 금으로 만든 연꽃무늬 대좌와 연꽃형 뚜껑을 갖춘 녹색유리의 사리병이 들어 있었다.

 기단부의 심초석에 설치된 사리공은 ‘品’자형으로 되어 있었으며 동쪽 구멍에는 배 모양의 광배를 갖춘 청동여래입상과 청동방울이, 북쪽 구멍에는 향류가 발견됐으나 서쪽 구멍은 이미 도굴된 상태다.

 이들 순금제 금강경판 등 사리장치는 국보 123호로 지정돼 현재 국립 전주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이 사리장치는 ‘관세음응험기’의 제석사지 화재기록에서 나오는 사리장치들과 내용이 흡사해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현재 탑의 조성시기에 대해서는 백제시대 설과 통일신라 설, 고려 초기 설이 대립, 주장되고 있다. 그러나 발굴결과 탑의 하부에서 다져 쌓기로 조성된 건물지 흔적이 발견되고 있어 석탑의 조성 연대는 백제시대보다는 다소 늦은 시기의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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