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이 보인다
논술이 보인다
  • <최찬 세종훈민구술논술대표>
  • 승인 2005.06.23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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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제시문은 교육에 대한 두 가지 견해를 제시한 것이다. 다음 제시문을 읽고 교육이 완전한 자율에 맡겨서 이루어 질 수 있는지, 아니면 어느 정도의 강제성을 띄어야만 하는지에 대하여 논하되, 인간의 본성과 연관지어 서술하시오.

  [가] 인간의 악한 본성은 원래 악한 것이니, 선이란 인위적으로 된 것이다. 인간은 나면서부터 이익을 추구하게 마련이므로, 그대로 내버려두면 서로 싸우고 빼앗기 때문에 양보란 있을 수 없을 것이요, 또 나면서부터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게 마련이므로, 그대로 내버려두면 남을 해치고 상하게 할 줄만 알 뿐 신의나 성실성은 없을 것이다. 또, 귀로 아름다운 소리를 듣고 눈으로 아름다운 것을 보려는 감각적 욕망이 있으니, 그대로 두면 무절제하여 사회 규범으로 지켜야 할 예의나 규범의 형식적 절차인 문리(文理)는 없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타고난 성질이나 감정에 맡겨 버린다면 반드시 서로 싸우고 빼앗아 사회의 질서를 파괴하고 세상을 혼란에 빠지게 할 것이니, 반드시 스승의 교화와 예의의 법도가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남에게 사양할 줄도 알고 사회의 질서를 지킬 줄도 알아 세상의 평화가 유지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사람의 천성은 원래 악한 것이 분명하며, 선이란 인위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구부러진 나무는 반드시 도지개를 대고 불에 쬐어 바로잡아야 곧게 되고 무딘 칼은 반드시 숫돌에 갈아야 날카로워지는 것처럼, 사람의 본성은 악하기 때문에 반드시 스승이 있어야 바로잡히고 예의를 얻어야 다스려질 것이다. 만일 스승이 없으면 편벽(便?)된 데로 기울어져 부정해질 것이요, 예의가 없으면 난폭해져서 다스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왕(聖王)이 이를 위하여 예의를 일으키고 법도를 세워 성정(性情)을 교정하고 훈련함으로써, 사회 규범에 따르고 도리에 맞도록 한 것이다. <순자 - 순자(荀子)>

  [나] 인간들이여, 동료 인간들을 깊은 사랑으로 대하라. 그것이 당신들의 첫째 의무이다. 어떤 신분의 사람에게도, 어떤 연령의 사람에게도, 인간에게 관계 있는 모든 것에게 인간적으로 대하라. 인간애보다 더 위대한 지혜가 있겠는가. 아이를 사랑해야 한다. 아이의 놀이를, 즐거움을, 사랑스러운 본능을, 호의를 가지고 지켜 줄 일이다. 입가에는 언제나 미소가 담겨 있고, 마음은 언제나 평화로웠던 그 시절을 때로 그리워해 보지 않은 사람이 우리 가운데 있단 말인가. 어째서 당신들은 천진 난만한 아이들에게서 그 짧은 순간의 즐거움과 그들이 남용할 줄 모르는 귀중한 행복을 빼앗으려 하는가. 당신들에게 있어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아이들에게 있어서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절, 금방 지나가 버릴 그 최초의 몇 년을 왜 당신들은 괴로움과 고통으로 채워 주려 하는가. 아버지들이여, 죽음이 당신들의 아이를 언제 데리고 갈는지를 알고 있는가? 자연이 아이들에게 준 이 지극히 짧은 시간을 그들로부터 빼앗음으로 해서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아이가 산다는 기쁨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면, 되도록 인생을 즐기게 하는 것이 좋다. 언제 신에게 불려 가도 후회가 없도록, 인생의 즐거움을 맛보지도 못하고 죽어 가는 일이 없도록 하라.

  나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는 많은 사람의 소리가 들려 온다. 저 허위로 가득 찬 지혜의 외침 소리가 멀리서 들려 온다. 우리를 끊임없이 우리 자신의 밖으로 쫓아내고, 언제나 현재를 무의미한 것으로 평가하며, 우리가 추적할수록 자꾸 도망쳐 버리는 미래를 쉴 새 없이 추적하고, 우리를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곳으로 끌고 가려는 저 허위에 가득 찬 지혜의 외침 소리가!

 당신들은 나에게 말할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나쁜 성향을 교정하는 시기이다. 고통을 적게 느끼는 어린 시절에 고통을 많이 주어, 이성의 시기에 고통을 덜 느끼게 할 필요가 있다.”라고. 그러나 그런 일이 모두 당신 뜻대로 된다고 누가 보장하겠는가? 또, 아이의 약한 정신을 괴롭히는 당신들의 그 훌륭한 교육이 아이에게 주는 고통에 의해, 아이가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다고 누가 보장하겠는가? 당신들이 멋대로 아이에게 주는 고통에 의해, 아이가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다고 누가 보장하겠는가? 아이의 힘으로 견뎌낼 수 있는 이상의 괴로움을 왜 주는 것인가? 현재의 괴로움이 장래에 도움이 된다는 보장도 없는데, 왜 그런 짓을 하는가? 당신들이 고쳐 준다는 나쁜 성향이 자연에서 생겼다기보다 오히려 당신들의 잘못된 배려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겠는가? 화(禍)가 되는 선견지명, 그것은 한 인간을 언젠가 행복하게 해 준다는 불확실한 희망에 의거해서, 현재의 그를 비참하게 만들고 있다. 만일 이런 범속한 이론을 내세우는 무리가 있어, 방종과 자유를 혼동하고, 아이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것과 응석을 받아주는 일을 혼동한다면, 그들에게 그것을 구별하는 법을 가르쳐 주어야 하겠다.<루소 - 에밀>

 ▶유의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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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와 다음주에는 교육과 관련한 논제를 싣습니다.

 잘 생각해보고 논제를 쓰신 학생은 ‘다음’(daum) 카페 ‘1psi119’의 ‘도민일보논제’게시판에 올려주시면 다음 호에 첨삭지도를 받을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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