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찬 선생의 논술 지상강좌(8)
최찬 선생의 논술 지상강좌(8)
  • 승인 2005.07.28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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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이 보인다<중앙대형 학업적성논술-인문계)
 [논제] 글 (가)와 글 (나)를 종합하여 한 편의 완성된 글을 작성하되, 두 글의 논지가 조화되도록 하시오.(300자, 답안지 12줄 이내)  

[제시문]

  (가) 심층 생태주의자들은 생태계 위기의 근원을 근대적 세계관에서 찾는다. 카프라(F. Capra)와 네스(A. Naess) 등은 근대적 세계관의 영향으로 인류는 자연을 마음대로 지배하고 생명체를 마음대로 조작하게 되었으며, 정치?경제에서 개인주의와 자유 방임주의를 정당화해 줌으로써 양적 성장을 추구하는 사회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드볼(B. Devall)과 세션즈(G. Sessions)는 “자연은 인간을 위한 자연 환경이기 때문에 인간은 자연을 지배할 수 있으며, 불어나는 인구를 먹여사리기 위해서는 물질적?경제적 성장이 필요하고, 그것을 위한 자원은 풍부하게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문제가 생기면 얼마든지 과학?기술 발전을 통한 해결책이 있기 때문에 소비를 많이 해도 허용되고, 이를 위해 중앙 집중적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세계관이 생태 위기를 유발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심층 생태주의자들은 근대적 세계관을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관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심층 생태주의자들은 “인간과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의 번성은 본래의 가치를 지니며, 인간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을 제외하고는 생명의 풍요로움과 다양성을 축소시킬 권리가 없다. 그리고 인간은 자연과 다르지 않고 분리될 수도 없기 때문에 모든 자연을 통일된 전체로 보고, 인간의 행위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할 때도 인간의 이해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국한하지 안고, 자연 전체에 어떤 결과를 미치는가를 놓고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이러한 세계관으로 전환하기 위해 동양의 노장사상과 선불교 그리고 기독교의 영성주의(spiritualism) 등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슬로건은 한마디로 “개체적 자아(self)를 실현하는 데 그치지 말고, 그러한 자아의 배후에 자연과 함께 하는 더 큰 자아(Self)를 실현하라”는 것이다. 그러한 생태학적 깨달음이 있으면 환경 문제는 자연스럽게 풀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보다 생태계의 우위를 강조하다 보면 자칫 인간 혐오주의로 전락할 수도 있다. 사실 생태계 파괴의 원인을 인간 전체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환경 문제를 호도하는 측면이 있다. 전세계 인구의 5%를 차지하는 미국이 전세계 에너지의 33%를 소비하고 있고,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일부 계층이 나머지 계층에 비해 엄청난 에너지와 자원을 소비하고 있는 현실을 무시한 채, 생태계 파괴를 무조건 ‘인간’ 전체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만일 건전한 생태계를 유지하기 위해 일부의 인간이 불가피하게 희생될 수밖에 없다면, 아마도 그 대상은 저개발 국가의 민중이거나 소외받는 계층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생태 중심주의는 자칫하면 일부의 인간이 나머지 인간을 지배하고, 다른 인간의 희생을 정당화하는 윤리로 악용될 수 있다.

  그리고 생태 중심주의자들이 이성에 대한 혐오를 넘어서 신비주의로 나아가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물론 신비주의를 통해 자연 세계와 상화 연관성을 느끼고 자연을 돌보는 태도를 가질 수는 있다. 그러나 신비주의 자체는 애매하고 임의적이어서 이성적 논증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반(反)지성주의와 연결되어 전 사회 영역에서 합리적인 비판을 질식시킬 수 있다. 따라서 분석적 이성의 한계가 있다고 해서 그 동안 성공적이었던 분석적?비판적 접근을 버리고, 곧바로 신비주의?원시주의?권위주의로 돌아가자는 움직임이 과연 생태 위기 해결에 도움이 될지는 의심스럽다.

  (나) 인간과 자연 또는 인간과 신 사이에 조성된 갈등을 주술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굿이다. 사람과 자연 또는 사람과 신령 사이에 맺힌 것을 푸는 굿을 하지 않고는 갈등이 지속되고 재앙이 거듭된다고 여겨서 굿을 하는 것이다. 굿은 다른 종류의 제의와 달리 주일이나 재(齋)일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문제가 생겼을 때 수시로 한다. 다시 말해 굿은 인간과 자연 또는 인간과 신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와 순조로운 소통이 필요성이 제기된 때에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생태학적으로 말하면, 개인이나 사회에 문제가 생기고 재앙이 발생하는 것은 개인의 문제나 사회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과 신 또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에 문제가 발생한 탓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아무리 올바르게 살고 아무리 노력해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재수가 없고 운이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는 노력도 헛수고이며 착한 행실도 소용없다. 알 수 없는 재앙이 거듭 닥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때 굿을 생각하게 된다. 나의 문제나 내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나 또는 내 가정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나 환경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 삶의 문제가 그 자체로 굴러가는 것이 아니라 나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물과 자연현상,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신령의 세계와 두루 얽혀서 굴러간다는 구조적 인식에서 굿이 비롯된다. 따라서 알 수 없는 문제에 부닥뜨려서 해결할 길이 보이지 않거나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재앙이 거듭 일어나고 불운이 계속 겹치면 주위 신령이나 자연물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판단을 하고,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굿을 하는 것이다. 인간의 문제를 그 자체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삼라만상과의 유기적 관련성 속에 인식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 굿의 세계관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유기체적 세계관’을 통해서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고자 하는 민중 의식이 굿 문화에 갈무리되어 있는 셈이다.

  이 유기체적 세계관을 통해 굿 문화는 모든 삼라만상이 서로 공생 관계에 있다는 생태학적 세계관과 만난다. 따라서 개인에서부터 가정, 마을, 고을, 나라에 이르기까지 맺힌 문제를 푸는 길, 곧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는 길은 인간의 노력만으로 불가능하다.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환경이나 신령의 세계와 관계가 틀어지면 문제 해결의 길이 막힌다는 생각에, 인간 중심주의적 문제 해결에 매몰되지 않고 무관심하게 지냈던 자연환경 또는 다른 존재의 세계와 관계를 원만하게 회복하고자 굿을 하는 것이다.

  굿은 바로 인간과 자연 또는 인간과 신의 상호 관계를 바로잡고 소통을 원만하게 함으로써 인간 사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처럼 인간과 세계 사이에 조성된 갈등을 해소함으로써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는 제의적 변혁 활동을 두고 굿 문화를 전승하는 민중들은 ‘맺힌 것을 푼다’ 라고 한다. 따라서 굿 문화에는 ‘푸는 일’, 곧 ‘풀이’가 많다. 푸는 것이 굿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굿에서 구체적으로 ‘고풀이’ 의식을 할 뿐 아니라, 굿을 하며 부르는 노래나 춤도 ‘제석본풀이’, ‘칠성풀이’, ‘성주풀이’, ‘살풀이춤’ 등으로 일컫기 일쑤이다. 풍물굿의 진풀이나 뒤풀이도 같은 맥락의 문화이다. 그러므로 우리 굿 문화의 미학은 풀이를 통해서 삶의 생명 본성을 활성화하는 ‘신명풀이’라 할 수 있다.

  굿 문화는 사실상 맺힌 것을 푸는 풀이의 문화이자 해방의 문화이다. 중요한 것은 풀이와 해방의 의미이다. 남에게 분풀이하거나 특정 대상을 향해 화풀이하는 것은 풀이가 아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 위에서 특권을 누리며 군림하거나 대상을 정복함으로써 얻게 되는 지배적 해방감을 누리는 것도 해방이 아니다. 오히려 대상을 섬기고 남을 위하는 데에서 풀이가 시작된다. 맺히고 막힌 것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고 대상을 섬기며 남을 위함으로써 공생적 해방을 누리고자 한다.

  <유의 사항>

 답지 한 칸에 한 글자씩 쓸 것. 문제에 제시된 글자 수를 지키지 않았을 때 감점이 있음. 글자 수는 띄어쓰기를 포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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