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통일을 돌이켜 본다-6자 회담 즈음해서
독일의 통일을 돌이켜 본다-6자 회담 즈음해서
  • 이규하
  • 승인 2005.08.03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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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4년 6월 28일 오스트리아가 합병한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자국의 군사력을 과시하기 위한 군의 사열 도중 황태자 부처가 슬라브계 독립운동가에 의해 피살됨으로써 제1차세계대전의 서곡이 울렸다. 전쟁은 오스트리아 제국이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함으로써 시작된 것이지만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전쟁을 독려하고 주도하였다는 이유로 종전 후 파리의 평화회담에 초대되지 않은 채 조약내용이 승전국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결정되었으며, 그 결과 독일은 오스트리아와 함께 엄청난 배상금을 지불해야만 하였고, 광범한 영토를 상실하였으며, 주권을 크게 제한받게 되었다. 마침내 독일은 그로부터 헤어나지 못한 채 제2차세계대전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러한 과거 역사의 큰 교훈을 돌이켜보면 베이징에서 한반도의 통일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북한의 핵 문제를 다루기 위한 이해당사자국들의 6자회담이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며, 세계평화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구상에서 단 하나의 분단국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독일의 통일에서 많은 것을 배워야할 것이다.

 독일의 통일 노력이 한창 무르익을 때 필자는 하버드 대학에서 연구 중에 있었으며,언론에 보도되는 미 정가와 국민들 속에서 표출되는 반대여론을 보고 크게 당황하게 되었다. 그러면 유럽 본토에서는 어떠했나? 그곳의 정부와 국민들은 하나같이 독일을 유럽평화의 교란자로 낙인찍고 독일의 군축, 나토에의 편입문제 등이 중심이 된 2+4(동서독+미영소불) 독일통일을 위한 회담에 대해서 강하게 반발하였다.심지어 고르바초프는 바이체커 독일 대통령을 만나 “현재는 2개의 독일국가가 존재하지만 100년 내에 무엇이 이루어질지는 역사가 결정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당황한 독일정부는 불만국가들을 수차 순회방문하여 독일은 현재와 앞으로도 영토요구권을 내세우지 않을 것이며 국경을 변경할 생각이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독일 외교사절단이 코카서스에서 휴양 중인 고르바초프를 찾아가 거액의 경제적 지원을 약속하자 고르바초프는 45년 동안 줄기차게 주장해 온 ‘통일 불가’의 입장을 풀어주게 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서방제국의 말뿐인 호의는 모스크바로부터의 ‘예스’란 긍정적인 허락이 나오자 유럽 중앙의 강력한 통일국가에 대한 공포감으로부터 저항으로 변해버렸다.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은 이후 수정하긴 하였지만 앞으로 수일이 지나면 독일의 통일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 하였고, 영국의 대처 수상은 처음부터 부정적인 입장이었으며 통일의 속도를 늦추어야 한다고 하였다.

 끝으로 우파에 속하는 베를린 대학의 냉전의 세계적 석학 놀테(E,Nolte)교수와 좌파이며 오늘날 지상의 최고의 사상가로 칭하는 프랑크풀트 학파의 하버마스(J,Habermas)교수의 한국통일에 관한 견해를 지면 관계상 짧게 줄인 몇 마디로 소개하고자 한다. 놀테 교수는 필자의 통역을 통한 전북대학교 개교 50주년 기념 특강에서, 독일과 한국은 다같이 제2차세계대전 후 분단된 국가로서 유사점보다는 차이점이 훨씬 더 많지만 한국은 독일보다 단일민족의식이 강하기 때문에 통일을 순조롭게 달성할 수 있으리라고 하였다. 그리고 서울대 문화관에서 독일-한국 통일에 관해서 나와 토론을 벌였던 하버마스 교수는 동독에서와 같은 북한의 돌연한 붕괴를 기대하는 대신에 적극적 지원과 점진적 통일을 권장하였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세상살이인데 누가 아무런 생각 없이 우리의 통일를 서둘러 줄 것인가? 바로 이것은 위의 독일의 통일과정에서 충분이 확인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북핵문제의 해결과 그와 밀착된 통일에 보다 낳은 조짐이 일기 시작한 이 호기를 맞아 정부와 국민들은 일치단결하여 배전의 노력으로 통일을 앞당겨야 할 것이다.

(전북대 명예교수·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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