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청보다 더 나쁜 것은?
도청보다 더 나쁜 것은?
  • 진봉헌
  • 승인 2005.08.04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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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가 안기부 비밀도청팀이 지난 97년 대선 당시 정계와 재계, 언론계 등을 무차별적으로 도청한 테이프를 공개한 사건의 진행과정과 그 파장, 이에 대한 국민의 반응을 보면 참으로 실망스럽다. 하나의 국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는지 부끄럽기 그지 없다.

 국민의 신성한 알 권리가 국민의 천박한 호기심을 채우는 권리인가. 차라리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라. 도청테이프 공개는 시청률을 올리기 위한 올인이라고. 그리고 국민의 알 권리는 선정적이고 상업주의적인 언론의 도피처라고.

 일련의 과정을 보면 무엇 하나 정상적인 것이 없다. 당연히 있어야 할 도청에 대한 하늘을 찌를 듯한 분노는 없고 피도청자들의 대화내용에 대한 분개만 있다. 그 당연한 귀결로 도청자들과 그들을 사주한 책임자들, 도청테이프를 빌미로 협박 공갈하고 자기들 뜻대로 되지 않자 이를 유포한 자들에 대한 처벌요구의 목소리는 작고, 테이프 대화 내용의 공개수사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높다.

 도청을 당한 사람들은 피해자이다. 도청된 이들의 대화내용을 수사하라는 것은 도청에 대한 도덕적 불감증에 걸린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문제는 국민의 다수가 이 주장에 부화뇌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선진국에서는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선진국에서는 불법하게 수집된 증거는 증거능력 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한 증거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불법수사를 막기 위한 것이다. 불법하게 수집된 증거의 증거능력을 인정하는 한 불법수사의 유혹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국가기관에 의하여 전 국민을 상대로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진 도청으로 녹취된 대화내용이 사실인지 수사하라고 시민단체들이 떠들고, 언론은 확성기로 중계하고, 국민들은 장단을 맞추는 2005년의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인가. 국가인 것은 맞는가. 도청한 대화내용에서 들어난 사실을 조사하는 것은 결국 도청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상이라도 주어야 하지 않을까? 국민들이 그렇게 알고 싶어 하는 것을 알게 해 주었으니까.

 도청으로 녹취된 대화내용을 수사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도청을 처벌하고 동시에 도청된 대화에서 드러난 범법사실을 수사하라는 자기들의 주장이 얼마나 자가당착적인 주장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길 바란다.

 국가기관에 의한 무차별한 도청은 절대 용서해서는 안되는, 국가의 기강을 근저에서 흔들고 인륜을 저버리는 중대한 범죄이다. 도청이 일상화된다면, 사생활의 보호도, 인권도 존재할 수 없으며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도 파괴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이번 도청사건의 연루자들을 법이 허용하는 범위내에서 최대한 엄벌을 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다시는 이 땅에서 도청이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 시민단체와 언론, 그리고 국민이 힘을 합쳐서 해야 할 일은 바로 그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용납할 수 없는 방식으로 수집된, 피도청자들의 대화내용이 무엇인지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성숙함과 엄정함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고 도청자들과 그들을 사주한 책임자들, 도청테이프를 빌미로 협박 공갈하고 자기들 뜻대로 되지 않자 이를 유포한 자들을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이제 국민들이 중요한 시험대에 올라와 있다. 선진국의 국민의 될 자격이 있는지, 영원히 미개국가의 국민으로 남아 있을지, 가슴 조리며 지켜볼 일이다.

(전주지방변호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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