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찬 선생의 논술 지상강좌<15>
최찬 선생의 논술 지상강좌<15>
  • 승인 2005.09.22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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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전논술

 역사는 진보하는가 

  ▶ 글 [가]는 시인과 역사가의 역할에 대한 견해를 밝힌 아리스토텔레스의 글이다. 이 글의 주장이 타당한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 글 [나]와 [다]를 활용하여 논하라.  

 [가] 시인의 임무는 실제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일, 즉 개연성이나 필연성에 따라 가능한 일을 이야기하는 데 있다. 역사가와 시인의 차이는 산문으로 이야기하느냐 운문으로 이야기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왜냐하면 헤로도투스의 작품은 운문으로 고쳐 쓸 수도 있을 것이나 운율이 있든 없든 간에 역시 일종의 역사임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에) 전자는 실제로 일어난 것을 이야기하고, 후자는 일어날 수 있는 것을 이야기한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시는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고 더 진지하다.

 보편적인 것을 이야기한다 함은(비록 시가 등장인물들에게 어떤 특정한 이름을 부여한다고 하더라도) 이런 또는 저런 유형의 인간이 개연적으로, 또는 필연적으로 말하거나 행할 수 있는 일을 이야기함을 의미한다. 개별적인 것을 이야기한다 함은 이를테면 알키비아데스가 무엇을 행하였으며 무엇을 경험하였는가를 이야기함을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 - ‘시학(詩學)’』 

 [B]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걸어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속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구름 위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다오.

 살찐 젖가슴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리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스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이상화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C] 일본은 소위 토지 조사 사업을 한국에 있어서의 토지 소유의 근대화 작업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일본의 토지 강탈이었다. 이로 인하여 일본인 대지주가 증가하였고, 한편 지난날의 양반들 중에서 지주가 되어 과거의 특권을 물려받은 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경작자인 많은 농민은 영세 소작농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이제 계약에 의한 소작인이 되었기 때문에 점차 토지 소유권으로 성장해 가던 경작권을 빼앗기는 보다 불리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또 자작농이라 할지라도 지극히 적은 농토밖에 소유하지 못하는 영세농이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였다. 그러므로 소작을 겸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지주의 수는 물론 자작농이 차지하는 비중도 극히 적었던 것이다. 즉, 1916년의 통계에 의하면 전 농가 호수 약 264만 중에서 지주가 불과 2.5%인 6.6만 가량, 자작농이 20%인 53만 가량인데 대하여, 자작 겸 소작농은 40.6%인 107만 가량, 순 소작농은 36.8%인 97만 가량이었다. 후 양자의 합계는 204만으로 전 농가의 77.4%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대부분, 즉 전 농가호수의 약 60%인 150만 가량이 1정보 미만의 적은 토지를 경작하고 있었다.

 이렇게 전락한 영세농민들의 생활은 비참할 수밖에 없었다. 1924년의 총독부 통계에 의하더라도 전 농가 2,728,921호 중에서 1년의 수지가 적자인 호수는 1,273,326호로서 백분비로 하면 약 44.6% 였던 것이다. 즉, 한국농가의 약 반은 매년 빚을 져야만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이 공식 통계 이상으로 그 수가 많았을 것임이 분명하다. 가난한 농민들은 식량이 부족하면 풀뿌리나 나무껍질을 벗겨 먹어야 했다. 그 수는 총독부 자신의 언명에 의하더라도 전 농가의 반을 넘었다.

  일제의 식민정책 밑에서는 이러한 추세는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촉진되었다. 자작농과 자작 겸 소작농은 소작농으로 몰락하여 그 수가 부쩍 늘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인 지주가 늘어갔다. 우리는 이를 다음과 같은 통계 숫자에 의하여 알 수가 있다. 즉, 1919년에 지주는 전 농가의 3.4%이던 것이 1930년에는 3.6%로 증가하였는데, 이것은 일본인 지주의 증가에 의한 것이었다. 자작농은 같은 기간에 19.7%로부터 17.6%로, 자자 겸 소작농은 39.3%로부터 31%로 각각 상당히 감소되었고, 반면에 소작농은 37.6%로부터 46.5%로 격증하였던 것이다.

 소작농이 지주에게 내는 소작료는 생산량의 2분의 1이 평균으로 되어 있었다. 게다가 소작농들은 비료대, 수리 조합세, 곡물 운반비, 지세 등을 부담하였고, 또 지주에게 노동력을 제공하였다. 농민의 생활이 점점 곤란하여질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리하여 화전민이 격증하여 갔다. 즉, 1916년에 화전민 수가 245,626이었는데, 1927년에는 697,088로 3배 가까이 증가하였다. 또 만주나 일본으로 이주하는 사람의 수도 해를 따라 증가하였다. 1927년에는 56만 가량이던 만주의 이민 수는 1936년에는 무려 89만으로 증가하였다. 또 1910년에는 250명에 지나지 않던 일본에 이민한 한국인 수는 1930년에는 30만으로, 1939년에는 96만으로 증가하였던 것이다. 만주에 가서 농업을 하거나 일본에 가서 노동을 하거나 간에 그들의 생활은 한결같이 비참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원주민들과의 알력으로 인하여 만주에서는 만보산 사건 같은 불행한 일이 벌어졌고, 이러한 사건은 일본의 중국침략에 악용되었다. 『이기백 - ‘한국사 신론’』 

 ▶유의사항

 1. 제시문의 내용을 적절히 활용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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