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의 기도, 한 번의 절망
세 번의 기도, 한 번의 절망
  • 진봉헌
  • 승인 2005.12.20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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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해가 간다. 만으로 해도 50세가 되는 해라 그런지 지난 50년의 일들이 주마등 처럼 스처 지나간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더니 지난 일들을 돌아보면 참으로 우여곡절이 많았다.

 식민지 폭정과 6·25 전쟁을 경험한 전 세대가 보았을 때에는 행복에 겨운 소리라 할 지 모르겠다. 그러나 산업화와 민주화의 압축성장 시대를 지나면서 겪은 혼란과 갈등도 개인들에게는 너무 힘에 겨웠다.

 그런데 크고 작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절박한 상황에 이르면 누구나 저절로 기도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특정한 종교를 믿지 않는 필자도 극한상항에서 절박한 심정으로 간절하게 기도한 적이 세 번이었다.

 한 번은 77년도 가을이었다. 삼성그룹이 성균관대학교를 운영할 당시 학교 전체를 수원캠퍼스로 이전하려는 재단의 무리한 시도를 반대하는 학생시위의 주동자로 나섰다가 설악산에서 도피생활을 하던 시절이었다. 앞으로 붙잡히면 구속되고 학교에서는 제적을 당해 강제징집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앞 일이 막막하였다. 그때 설악산 봉정암에서 간절히 기도하였다. “학교에 다닐수 있도록 해 달라고 ”, 그 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서울로 되돌아 가던 중 휴게소에서 거짓말 같은 ‘삼성그룹이 성균관대학교 운영을 포기하였다,는 신문기사를 보았다. 학교로 되돌아 가 정리집회를 끝낸 후 동대문경찰서에 연행된 필자는 훈방되었고, 학교에서는 제적처분을 받았다가 다시 무기정학으로 감경되어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기도가 통한 셈이다. 그리고 그 배경은 그 시대에는 그래도 최소한의 양식은 유지되고 있었기 ?문이라고 생각한다.

 또 한 번은 82년도 가을이었다.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게 된 필자는 81년도에 제23회 사법시험에 합격했었다. 그런데 광주학살을 통해 집권한 전두환 정권은 학생시위 경력자라는 이유로 필자를 3차 면접시험에서 탈락시켰다. 다음해 가을 다시 3차 면접시험만 보게 되었을 ? 간절히 기도하였다. “시험만 합격시켜 달라”고, 그러나 또 탈락이었다. 정치깡패들이 집권한 사회에서는 최소한의 양식도 지켜지지 않았다. 정말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직장생활을 하다가 다시 공부하여 제28회 사법시험에 합격할 때까지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약이 되기도 하였다고 위안한다. 세상이 자기 뜻대로만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값진 교훈을 얻었으니까.

 올 3월에도 병실에서 간절하게 기도하였다. 6-7년전에 수술한 한쪽 눈의 병이 재발되어 실명의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5시간 이상 심혈을 기울려 수술을 해 준 의사선생님 더분에 완쾌되었다.

 적지 않은 세월 50년을 돌이켜 보면서 느끼는 가장 큰 감회는, 개인에게는 그가 어떤 사회에 살고 있느냐가 너무나도 중요하다는 점이다. 최소한의 양식이 지켜지는 사회는 공기나 물만큼 개인에게 소중하다. 그리고 의사든 변호사든 모든 직업의 종사자가 최선을 다하는 사회가 된다면 개인은 한결 살기가 좋아진다.

 며칠 남지 않은 2005년의 마직막 날들은 이 사회를 이 만큼이라도 살만하게 만든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하면서 보내고 싶다.

<전주지방변호사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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