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와집, 십자가, 파이프오르간
기와집, 십자가, 파이프오르간
  • 곽병창
  • 승인 2005.12.25 19: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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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이 자랑하는 고도(古都) 나라(奈良) 시내 한 복판에는 길게 이어진 아케이드가 있다. 높다란 궁륭형의 천정을 머리에 이고 좁은 골목길의 양 옆에 각종 상가들이 죽 이어서서 물건을 판다. 전통을 창의적으로 잘 이어받으면서 그 바탕을 이용해 장사도 곧잘 하고 있는 일본의 도시들을 찾아 나섰던 올봄의 일이다. 그다지 긴 여행은 아니었지만 밤낮으로 이어진 일정에 일행들은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나라마쯔의 전통가옥군을 살펴 보고 그 안에 구석구석 깃들여 있는 방송국이며 음성관, 쌈지형 박물관 등에 탄성을 자아내던 한나절의 마무리쯤이었을 것이다. 집결지를 향해 가는 지름길로 그 긴 상가를 택했던 셈인데, 그 중간쯤에 벚꽃이 눈부시게 핀 작은 언덕이 보였다.

 언덕으로 올라가는 아담한 계단, 그리고 그 계단 끝에 조그맣게 서 있는 기와집이 눈에 들어왔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 기와집의 지붕 위에 수줍은 듯 솟아있는 십자가에 눈길이 가 닿았다. 기와집 지붕 선 위로 솟은 십자가의 형상은 우리 오래된 성당이나 교회 건물들에서도 가끔 보던 것인데, 그 날 거기서의 십자가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발길이 끄는 대로 계단을 올라 본당 안으로 조심스레 들어섰는데, 낮은 천정과 정갈한 마루며 의자들, 그리고 강대상이 눈에 들어왔다. 약간 늦은 오후의 햇살이 비스듬히 들이비쳐서 바닥에 엷고 긴 그림자를 드리웠는데, 짐작컨대 홀로 청소 봉사를 하고 있던 여신도 하나가 다가왔다. 어느 결에 곁에 다가와 섰던 일행 한 분이 몇 마디를 나누더니 강대상 앞으로 가 짧은 기도를 올리고 온다. 그리고는 그 교회가 예수회 교당이라고 일러준다. 정면의 십자가와 야트막한 강대상, 한없이 소박하고 평화스런 여신도의 얼굴을 그윽히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등 뒤의 벽면을 보니, 아-, 거기 온 벽면을 차지한 파이프오르간이 오후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 내고 있었다. 초라해 보이기까지 하는 오래 된 기와집, 정갈하게 닦인 마루, 뒤꿈치를 든 채 나지막히 말을 건네는 신실한 여인, 새로 네 시쯤의 호박색 햇빛-. 그리고 이제 막 오후 예배의 찬양을 마쳤을 저 길고 불룩한 금속 악기들의 풍요로움-. 나는 문득 엔도 슈우사꾸의 소설, ‘침묵’이 생각났다. 자신의 곁에서 몇 날 며칠에 걸쳐 서서히 죽어가는 신도들의 비명을 견디지 못하고 성모의 초상을 밟고(踏畵) 지나가 버린 선교사, 속인들의 거리 속으로 사라져 가 버린 그 젊은 배교자의 길 앞에 과연 성(聖)과 속(俗)은 무엇이었을까? 지켜야 할 오랜 가치관과 받아들여야 할 새로운 가치관 사이에서 그처럼 극한의 고통과 갈등을 피하지 않은 저들의 역사는 우리와 어떻게 같고 다른가? 그리고 이제 마침내, 세계적 전통문화 도시의 한 복판에 숨바꼭질하듯 자리 잡고 있는 저 소박한 교회는 또 무엇인가?

 오래되고 낡은, 그러나 정성스런 손때가 구석구석 배어 있는 건물과, 작고 야트막한 십자가의 소박하고 겸손한 아름다움, 그 안에 들어있는 파이프오르간의 흐뭇하고 풍요로운 조화를 보며, 다시 전통과 외래를, 아름다움과 추함을 생각한다. 변하지 않는 것의 아름다움 못지 않게, 올바르게 변하는 길을 위해 긴 세월을 고통스럽게 궁리하는 일도 아름답다. 그리고 그 세월의 무게, 번민의 깊이가 은근히 배어 있는 모든 형상들은, 고통 없이 보호받으며 온존되어 온 원형의 형상들보다 더 치열한 아름다움을 지닌다. 동시에 그들은, 세련되고 독창적이며 재빠른 길을 헤쳐 가는 예술작품들보다 더 미래적이다.

 결국 모든 아름다운 형상들, 행위들의 근저에는 인간의 삶에 대한 그리고 우주와 자연의 길에 대한 집요하고 고통스런 물음이 있는 것 아닌가? 전통을 둘러싸고, 전통이 미래를 향한다는 이 엄숙한 명제를 앞에 두고, 섣불리 ‘-이다’와 ‘아니다’를 입에 올려 쌌는 지식인들을 향해, 저 남의 나라 뒷골목의 기와집 교회 한 채가 슬며시 웃는 듯하다.

<전주세계소리축제 총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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