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느림’의 미학
① ‘느림’의 미학
  • 이원희
  • 승인 2006.01.19 1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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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시대의 중요한 코드가 문화이다. 문화지수가 삶의 질을 나타내는 지표가 되면서 전방위적으로 우리는 문화적 세례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타인의 시선이 감옥이라듯이 문화는 자칫 자유로부터 억압을, 창조성이 아닌 획일화를 부추기기도 한다.

 매주 금요일 새롭게 연재되는 이원희의 ‘컬처 플러스’는 영화, 문학, 음악, 미술, 연극, TV 등의 중요 키워드를 읽어가면서 삶의 의미를 생각하는, 산책의 글이 될 것이다. <서문> 

지난 70년대 우리의 국가적 목표는 경제성장에 두었다. 남보다 부지런히, 많이, 빠르게 몸을 부려야 잘 살 수 있다는 기치 아래, 증산ㆍ수출ㆍ건설 라인에 속도를 실었다. ‘바쁘다 바뻐’라는 유행어를 낳을 정도로 그때는 정말 아찔한 현기증의 속도에 우리의 정신과 육체를 몰아 넣었다. 그 결과 우리는 지금의 경제적 풍요를 누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욕망이 작동하면 즉각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유통, 소비 시스템도 구축되었다. 어디 그 뿐인가. TV 리모콘, 패스트푸드, 온갖 인스턴트 식품과 일회용 물품 등 ‘즉각 품목’들이 즐비한 시대... 호주머니 사정만 허락한다면 원하는 건 언제 어디서든 쉽게 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물량적으로 보다 많이 생산하고, 보다 많이 소유하며 쉽게 목표치에 도달하고, 손쉽게 소비해버리는 것이 과연 진정한 행복지수와 비례하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오직 성장과 발전, 성공과 출세의 앞길을 향해 그저 무소처럼 달린다. 먹고사는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기에 잘 살아보겠다는 욕심에는 변함이 없다. 물론 잘 사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가난이 미덕은 아니기 때문이다. 잘 살기 위해 우리는 최선을 다한다. 고지를 향한 힘찬 질주다. 그 질주가 절박하기에 오직 앞만 보고 달릴 뿐 주변에 눈길주기가 용이롭지 못하다. 그래서 우리는 삶의 과정으로써의 즐거움은 경험하지 못할 때가 많다. 마치 먼 산만을 바라보며 달리면서 중간중간에 들어오는 들녘이나 숲의 아름다움은 눈 밖에 두는 것과 같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말이 있다. 산을 옮겨놓듯 느리게 사는 삶. 어리석은 자의 이 행동은 허위단숨으로 달려왔던 지난 길을 되돌아볼 때 택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진정한 삶의 가치나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장자(莊子)의 소요(逍遙)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산책은 인류 역사에 커다란 정신적 지평을 열어주었다. 산책의 철학. 서두르지 않고 조용히 자연과 자아를 관조하면서 삶의 진정한 길을 찾았던 이들의 모습이 빛나 보이는 것은 속도감에 도취된 채 자아를 몰각한 삶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반사적 교훈을 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현실논리에 매몰된 채 자아를 잊고 사는 현대인을 향한 가르침이기도 하다.

 행복은 먼 데 채색구름 위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나와 이웃에 눈을 두고 자신을 반성하면서 이웃과 더불어 나누는 삶이 행복이다. 있는 것에 대해 무한정 욕심을 부릴 것이 아니라, 현실사회에서 우리에게 진정 있어야 할 것,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항상 생각하며 부족한 점을 보충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생의 가치이다. 속도의 경쟁에서 밀려난 자들에게 내 몸과 같은 관심, 따뜻한 시선으로 소외되고 억압된 자들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 그나마 속도의 시대에서 우리가 챙겨야 할 최소치의 양심이다. 현재의 입장에서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과연 현실에 투철한 인식을 가지고 살고 있는가. 이러한 스스로의 질문과 반성은 설령 목표도달에 다소 속도가 느릴망정 실수가 덜한 삶을 다져나갈 수 있다. 따라서 느리게 산다는 것은 게으름이 아니라,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면서 스스로의 삶을 반성하는 태도이다. 오일삼성(吾日三省)이라는 옛말이 있듯이, 하루에 세 번은 그렇다 해도 하루에 한번 정도는 나직이 자신의 삶의 방식에 대해 진지하게 되돌아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반성의 덫에 걸리는 자신의 삶의 방식이 있다면, 다소 더디게 생을 걸어간다 해도 수정하고 또 수정하는 여유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느림의 미학이다.

<극작가·한국사이버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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