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디푸스, 황우석, 그리고 무지(無知)한 열정
외디푸스, 황우석, 그리고 무지(無知)한 열정
  • 곽병창
  • 승인 2006.01.24 15: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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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에 뛰어난 사관 누군가가 있어 21세기 벽두의 이 시대를 다시 기술한다면, 그는 과연 어떤 평가를 내릴까? 사람들이 너무도 쉽게 영웅을 만들고 또 허물어 버리던 시대, 스스로에 도취한 영웅들이 도처에서 또 다른 자칭 영웅들과 부질없는 싸움을 벌이던 시대, 그 경박스럽고 얄팍한 생각들로 세상의 온갖 책이며 지면들이, 이른바 온라인이라 부르는 괴이한 공간의 벽보까지가 도배질 당한 시대-. 이렇게 기억하지 않을까? 혹시 그들 후세의 사관이 지금 이 시대 이 시절 경박함의 자식들이 아닐 수만 있다면 말이다. 그렇다. 이 시대의 비극은 영역과 장르를 막론하고 너무나 가벼워진 현실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그 비극의 주인공들이 지닌 가장 큰 결함(hamartia)은 역시, 고전적으로, 자신의 결점에는 철저하게 맹목적이고, 타인의 과오를 짚어 내는 데에는 필요이상으로 집요하고 열정적이라는 점에 있다. 나라가 피폐해지고 백성이 죽어가는 원인이 자신의 잘못 선택한 결혼에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집요하게 그 비밀을 파헤치다가, 마침내 제 눈 찌르고 죽어가는 외디푸스의 비극이, 지금 여기, 21세기 대한민국 땅에서 엄연히 되풀이되고 있는 것이다. 오래 전 희랍 극작가들의 탁월한 통찰력에 탄복하고만 있기에는 외디푸스와 황우석이, 노무현과 박근혜가, 또 우리들 중의 누구누구 등이 너무도 섬뜩하게 닮은 꼴 아닌가? 무서운 것은 바로 무지나 열정이 각각 따로 굴러가지 않고 늘 동행한다는 사실이다.

 누구보다 진지하게 세상을 고민하고 시대의 선구자로 청춘의 열정을 불사르던 이들이 천박한 속물 정치꾼으로 변해서 대안도 없는 삿대질로 세월을 보낸다. 모든 정책과 연설, 이합집산과 성명서의 뒤에는 세속적 계산과 거래가 바탕을 이룬다. 하물며 이들을 감시하고 견제할 이들의 언술조차 감상적이고 즉물적인 판단에 뿌리를 두고 있거나 정파적 이해에 따라 왜곡과 과장, 섣부른 찬사와 매도를 서슴지 않는다. 많은 순박한 이들의 가슴 속에 희망을 주었던 한 과학자의 영웅적 이미지는 몇 겹으로 덧칠 되어 있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을 오리무중의 알몸으로 시장 바닥에 팽개쳐진 채 돌멩이를 맞는다. 과학의 엄정함에 대한 오래 된 신뢰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난치병 환자들을 향한 순수한 열정에 박수를 보내던 이들마저 공황상태에 빠져들었다. 남은 것은 비난과 의혹과 절망, 냉소로 가득한 자조뿐이다. 자타가 공인하던 작고 화가의 작품을 둘러싸고 벌이는 진품/위작 논쟁도 이에서 별반 다르지 않다.

 살펴 볼 일이다. 누가 영웅인지 왜 영웅인지를 묻기에 앞서서 우리가 영웅을 어떻게 만들고 허무는지, 영웅이 영웅 되는 일에는 어떤 객관적 통찰이 수반되어야 하는지를 되물어야 한다. 그 대상이 정치적 영웅이든, 학문세계의 영웅이든, 예술작품이든, 이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우리가 진정한 지적 통찰력을 가지고 이 거대하고 철없는 사기극의 시대를 반성하지 않는 한, 정치도 학문도 단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예술인들 예외일 수 있으랴?

 창작 예술에 대한 지원과 그 발표의 기회가 획기적으로 늘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척박했던 시절에 비해 양질의 창작예술 작품을 만나기는 더 어렵다.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한마디로 무지한 열정으로 작품을 서둘러 재단하는, 경박하게 집단화한 인상비평만 남고, 작품의 진정한 가치를 탐색하기 위해 창작자 못지않은 고뇌를 바치는 진정한 비평이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창작물이 왕성하게 만들어지고 좀 더 많은 이들이 이를 감상, 향유하며 진정한 의미의 전문적이고 생산적인 비평을 통해 창작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창작과 비평의 선순환 구조가 절실하다. 문화의 시대를 아무리 되뇌어 강조하고, 예술의 고장임을 아무리 뻐겨 보아도, 창작 예술품을 둘러싸고 벌이는 제대로 된 비평적 분석 하나도 없이 막연한 느낌만으로 그 성패를 재단하는 풍토로는, 좋은 예술품을 기대하기 어렵고, 이 천박함을 면할 길도 없기 때문이다.

<전주세계소리축제 총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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