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 동학농민혁명 전적지
정읍 동학농민혁명 전적지
  • 한성천 기자
  • 승인 2006.02.02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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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읍시 전역에는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사적지가 모두 24곳에 달한다.

 곳곳에 불의에 맞서 봉기한 농민들의 숨결이 곳곳에 살아 숨쉬고 있다.

 ▲향토현전적지=1894년 5월(고종 11년)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싸워 최초로 크게 승리를 거둔 전적지로 동학혁명기념탑을 비롯 전봉준 장군의 동상과 사당 유품을 전시한 기념관, 광장, 주차장을 갖추고 있다.

 1987년에 전봉준 장군상 및 동학농민군의 부조물이 건립되었으며 백산 창의문 중에는 ‘우리가 의(義)를 들어 여기에 이르렀음은 그 본의가 결코 다른데 있지 아니하고…(중략) 고통을 받는 민중들과 굴욕을 받는 소리(小吏)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지라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돌이키지 못하리라.’ 라는 동학농민군의 그 때의 함성이 묘사되어 있다.

 1983년 콘크리트 한옥 양식으로 건립한 기념관에 동학농민혁명 당시를 생생하게 그린 기록화 4폭과 장군의 마을 유품, 사료 및 당시의 병기 등 87종 104점이 전시되어 있다. 1991년에 한옥 양식으로 건립한 사당으로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장군과 동학농민군 참전제위 위패를 모시고 있다.

 ▲동학혁명기념탑=현재 황토재 마루에는 ‘제폭구민, 보국안민’이란 농민군이 내걸었던 구호를 새겨놓은 최초의 기념탑인 갑오혁명기념탑(1963년 건립)이 있다. 뒷면에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라는 노래와 함께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되면 못가보리’라는 노래가 새겨져 있다.

 이것은 갑오(1894), 을미(1895), 병신(1896)으로 이어지는 당시의 민중들의 염원(이 때를 놓치면 영영 나라를 구할 수 없다는)을 보여주는 구전민요다. 황토재 주변에는 전봉준 장군 부인의 묘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고부관아터=현재 전북 정읍시 고부면 소재지 내에 위치한 고부초등학교가 고부관아가 있던 곳이나 지금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고부는 지리적으로 호남의 삼신산이라 불리는 두승산이 있고 고창 방장산에서 발원하는 눌지천이 북쪽으로 흐르고 있다. 눌지, 팔왕, 백산평야와 배들, 수금, 달천평야가 펼쳐져 있으며 당시 서해안의 부안땅을 관할하고 있어 해산물 또한 풍부한 천혜의 낙토라 이를만한 고을이었다.

 그리하여 백제때부터 남방경영의 중심지가 되었고 오늘날 이름인 고부로 일컬어진 것은 신라통일 후 신라경덕왕 16년(757년) 부터다.

 조선시대에 와서도 전라도 서부지역의 정치, 군사의 중심지이자 서해안의 요진(要鎭)으로 내려오다가 1914년 일제시대때 정읍군으로 폐합되어 백산면은 부안군으로, 부안면은 고창군으로 각기 편입되어 동학농민혁명 이후 동학농민군과 함께 쇠락을 같이한 고을이다.

 ▲말목장터=1894년 1월 10일 밤 동학농민군(고부농민봉기)이 예동마을에 최초로 집결하여 고부관아로 진격한 곳으로 고부 점령 후 농민군 진지가 되었다.

 만석보에서 서쪽으로 약 2km 가량 떨어져 있으며 오늘날 지명으로는 정읍시 이평면 두지리이다. 당시에 군내의 중심지로 전라도 일대에서는 손꼽히는 농산물 거래시장이 섰다고 하는데 그 장은 일제시대까지 내려오다 없어졌다고 한다.

 면사무소 맞은편에는 전봉준장군이 집결한 농민들에게 일장연설을 하고 기대어 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아름드리 감나무가 있다. 아름드리 감나무는 2003년 8월 25일 강풍으로 도북되었으나, 방부처리하여 황토현기념교육관에 전시 보존되어 있다.

 ▲전봉준장군 고택=녹두장군 전봉준의 유물로 유일하게 남아있는 이 집은 1894년 고부농민봉기 이후 안핵사 이용태에 의해 불타 버렸으나 다시 보수하여 사적 제 293호로 지정하여 보존되어 오고 있다.

 오늘날의 지명은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 조소마을이지만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는 고부군 궁동면이었다. 죽창문의 방 3개와 부엌이 딸린 본체가 있고 마당가에는 변소와 헛간으로 쓰이는 아랫채가 따로 있는 전형적인 한국의 시골집으로 각지에 유동생활을 했던 전봉준 장군이 고부농민봉기가 있기 5~6년 전에 이사와 훈장생활을 하다 고부농민봉기를 일으킬 때까지 거주하였던 집이다.

 ▲동학농민혁명 기념교육관=2004년 5월 11일 개관한 동학농민혁명 기념관은 전시관 교육관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이해와 정신의 선양 장소로 활용 되고 있다.

 전시관은 전통초가형으로 만들어진 건물로 안에는 수장고, 기획전시실, 1·2층 상설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교육관 역시 전통초가형 건물로 세미나실, 강의실, 대강당(283석)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김개남 장군 고택터와 묘역=김개남 장군의 손자인 김환옥옹이 산외면 정량리를 출생지라 주장하고 있으며 이곳은 동학농민혁명 무렵 김개남장군이 살았던 고택으로 보인다. 현재는 밭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고택터임을 알 수 있는 것은 밭 가장자리에 설치되어있는 표석이 유일하다.

 묘역은 동학농민군 총관령 김개남 장군의 허묘로 황토현문화연구소가 발의하여 1995년 4월에 조성하였다. 

 ▲손화중 장군 생가터와 묘역=이곳이 생가터라고 확인 해준 사람은 밀양손씨 자손인 손현선씨로 당시의 가옥은 없어지고, 그 대지위에 다른 형태의 집이 지어졌고 문은 현재 1번 국도와 접해있지만 과거에는 북쪽으로 나있었다. 손화중 장군의 묘역은 허묘로 1996년 후손(손홍열 등)들이 묘역을 조성했다. 

 ▲무명농민군위령탑=1994년 (사)갑오농민혁명계승사업회에서 사발통문 작성지인 고부면 신중리(新中里) 주산(舟山)마을에 건립한 탑은 5m 높이의 주탑과 사발통문 모양의 둘레석, 주탑을 둘러싼 1∼2m의 보조탑 32개로 되어 있다.

 보조탑 전면에는 농민군들의 울분, 비탄 등을 부조물로 표현하였고, 중앙 주탑에는 농민군의 한을 극복하고 전진하는 기상으로 승화시켜 오늘날 우리가 이어받아야 할 정신적 상징물로 이름 없이 쓰러져 간 무명동학농민군을 위한 조형물로 전국 최초로 건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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