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다시 ‘사랑’으로
③ 다시 ‘사랑’으로
  • 이원희
  • 승인 2006.02.09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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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들은 어떻게 태어났는가 / 사랑에서 / 우리는 어떻게 멸망할 것인가 / 사랑이 없으면 /

 우리들은 무엇으로 자기를 극복할 수 있는가 / 사랑에 의해서 / 우리들을 울릴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 사랑 / 우리들을 늘 결합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 사랑’

 독일 문호 괴테의 시다.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내내 사랑에 뜨겁고 사랑으로 아퍼한다. 이 이중의 모순이 짠 피륙을 몸에 두르고 살고 있다. 그러나 사랑이 없다면, 우리에게 사랑이 실종되어버린다면, 그 삭막한 모랫바람의 인생을 어찌 걸어갈 수 있으랴.

 나이가 들수록 누구나 주름이 생긴다. 세월의 흔적. 혹은 격정적인 생을 걸어온 일종의 표시인지도 모른다. 생물학적으로는 세포의 노화현상으로 설명할 수 있겠지만 구체적인 삶의 입장에서 본다면 적어도 얼굴의 주름은 굴곡진 삶에 비례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 인간은 세상이 열려진 까마득한 날부터 지금까지 고단한 삶을 산다. 그 주범은 욕망과 집착이다. 삿된 욕망이든 정당한 욕망이든 욕망이 자라면 집착을 낳고 집착은 자기동일성을 파괴하기 십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혼란스럽고 애성 바치며 소란스러움에 몸서리를 친다.

 하지만 부서져 떨어져 나갈 것만 같은 생을 그래도 다져나가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랑이다.분명 사랑은 위대하다. 그래서 종교와 학문의 최종 도달점을 인간과 지혜에 대한 사랑에 두고 행함을 그 목표로 삼고 있는지 모른다. 어디 그 뿐이랴. 인간가치를 높이고 존재의 의미를 덮게 하는, 도틀어 말해 ‘문화’라고 하는 모든 현상이 바로 ‘사랑’을 중심에 둔다. 역설적으로 사랑이 제거된 문화는 문화가 아니다.

 우리 고전의 대표성을 갖는 <춘향전>만 보더라도 작품을 꿰미로 묶는 건 사랑이다. 어디 <춘향전> 뿐이랴. 고전의 반열에 오른 숱한 작품들은 모두 ‘사랑’을 중심주제로 담고 있다. 중세문학의 백미인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비롯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 그리고 우리의 <황조가> 이래 쏟아져 나온 별빛 창창한 사랑이야기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처럼 바다의 동서를 막론하고 사랑을 주제로 한 삶의 이야기가 부지기수로 많음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굳이 철학적 논변을 덮어두고라도, 사랑은 인간사회에서 가장 위대한 보물이라서 그런지 모른다. 지구가 멸망하는데 너를 특별히 가상히 여겨 지구를 탈출하게 해줄테니 네가 가지고 싶은 걸 세 가지만 가지고 떠나라고 신이 어떤 이에게 허락했다. 요샛말로 하면 으레 신용카드나 휴대폰, 여자친구 따위가 거론될 법한데 어떤 이는 대뜸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머니와 꽃과 사랑이랑 떠나고 싶다고... 사랑은 단순히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다. 구체적인 사물로써 꽃이요, 꽃은 지상에 존재하는 자연물 가운데 사랑이라는 관념을 대표하는 사물이다. 어머니는 어떤가. 인간 가운데 가장 사랑이라는 관념에 근접한 존재가 바로 어머니가 아니던가. 이로 보면, 사랑은 불가시하고 무정형의 모호한 게 아니라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 둘레에 존재하는 이름 있고 가치 있는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사랑은 단순히 연인과의 교류적인 감정에서 솟구치는 불잉걸같은 뜨거움만은 아니다. 사랑은 자연과 인간 그리고 주변 사물에 온전한 시선을 가질 때 형성되는 그런 가벼움이기도 하다. 사랑의 감정으로 대상을 바라보자. 그러면 대상 역시 장밋빛으로 나에게 온다. 그러니 어찌 사랑이 무겁다고만 할 수 있는가. 대상을 온전히 바라보는 것은 관찰과 탐색을 낳고 탐색은 지식을 낳는다. 이런 논리를 주욱 따라가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말한 대로 사랑이야말로 지식의 어머니라고 할 수 있다.

<극작가·한국사이버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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