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적 가치의 회복을 위하여
인문적 가치의 회복을 위하여
  • 곽병창
  • 승인 2006.02.19 14: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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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또는 무엇 때문에 못 사는가? 평균적 대한민국 국민인 우리가 아침햇살을 받으며 일터로 나가고 제각기 보람찬 하루를 보내고 느긋한 귀가를 되풀이하는 동안에, 세상 어디선가는 진흙더미에 깔리고 소나기에 휘말려 수천 명이 죽어간다. 죽을 때까지 참으로 살고 싶었을 그들과 같은 시간대의 휴일 새벽에 우리는 금은메달을 모조리 휩쓰는 토리노의 어린 선수들과 더불어 환호작약한다. 억울함과 분노, 자신의 무능에 대한 자학으로 이라크인 포로가 울부짖으며 콘크리트 벽에 머리를 짓찧고 있는 사이에 그 반대편 어디쯤의 그림 같은 필드에서는 시간당 몇 억원의 상금을 쏟아 붓는 골프대회가 한창이다.

 이 모든 일들은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가? 통한의 휴전선은 관타나모 수용소와 필리핀의 산사태, 그리고 월스트리트의 큰 손들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컴퓨터게임에 빠져 몽롱한 표정으로 밤을 새우는 아이들은 식민지의 만주벌판을 언 발로 누비고 다녔을 그 또래의 독립군 투사들을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가?

 이 세상의 모든 사물들, 가치들은 서로 관련을 맺고 있으며, 그들은 늘 변화한다. 마치 생물들이 자라듯이, 때로는 정교하게 또 때로는 예측불허의 방향으로 진화하거나 소멸하고 다시 태어난다. 기억해야 할 과거와 대비해야 할 미래 사이에서 우리가 목 매달고 있는 현실은 정작 스쳐 지나가는 환각처럼 재빠르다. 그래서인가, 우리는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이 시공에 대해 또 우리들 자신에 대해 너무 무심하다.

 사람들이 자신의 발밑을 제대로 살피지 않고 자신들의 힘이 어떻게 어디로 작동하는지 살피는 일에 소홀했을 때 역사는 실로 거대한 오류에 봉착한다. 나찌즘, 파시즘의 광기가 한두 사람의 마녀적 선동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그 시절을 공생하며 동의한 절대적 대중의 몰이성이 더해져 그 끔찍한 결과를 낳았듯이, 구성원의 무지와 편견이 공동체를 파괴하는 데 얼마나 가혹한 무기가 되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는 얼마든지 많다. 인류사의 가장 진화한 문명을 구가하고 있다고 자부하는 유럽대륙의 시민들이 마호?의 머리에 2차대전 연식의 시한폭탄을 씌워 올려놓고 희희덕거리는 사이에 인류공동체의 밑둥은 썩어간다. 수백 장의 포로학대 사진이 폭로되었어도 당연하다는 듯 눈 하나 까딱 않는 저 세련된 강대국 관리의 표정에서 집단적 분노와 학살이 꼬리를 무는 연옥 같은 대재앙의 기미가 보인다. 그런데도 저 일은 우리와 무관한가?

 무엇인가? 우리들의 따뜻한 잠자리, 튼튼한 밥상이 이대로 영원하리라는 착각을 끊임없이 조장하는 힘은 무엇인가? 내 눈 앞의 일상, 내 식구의 욕망 말고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게 하는 교묘하고 음험한 메카니즘이 어디서 꿈틀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믿고 싶지 않지만 최근의 짧은 뉴스는 그런 망상을 끊임없이 부채질한다. 전국의 국립대학에서 철학과가 사라져 가고 문학 전공자들의 사분의 일이 전과를 해서 어디론가 떠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다. 이미 오래 전에 중고등학교에서 세계사를 가르치지 않는 나라, 국사조차 선택적으로 배우면 되는 나라, 철학, 윤리, 예술이 내 식구 밥 먹는 일과 무관한 먼지투성이 지식쯤으로 여겨지는 나라에서 공동체의 미래를 논하는 것은 참으로 공허하다.

 두말 할 것 없이 인문학의 붕괴는 사회를 황폐하게 한다. 분배를 강조하면 빨갱이라 낙인을 찍고 성장을 강조하면 독재의 기억만을 떠올리는 이 천박함도 결국 사람에 대한 생각의 천박함에서 나온다. ‘친노’도 ‘반노’도 아닌, ‘황빠’도 ‘황까’도 아닌 다양한 사람들의 생각이 존중되고, 단일민족의 자긍심 못지않게 피부색 다른 많은 이들을 쓸어안을 수 있는 여유를 갖는 일도 다 인문적 가치를 되살릴 때에만 가능하다. 우리가 공존과 번영의 시대를 연 주역으로 기억될지, 욕망과 광기, 증오로 얼룩진 대재앙의 시대를 만들어낸 주역으로 기억될지는 전적으로 인문적 가치의 회복 여부에 달려 있다.

 이제라도 우리의 아이들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삶을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자기 핏줄의 역사를 꼼꼼히 되새겨 보게 해야 한다. 광범위한 예술적 체험을 통해서 사람에 대한 통찰을 기르고 이질적 가치와 공존하는 삶의 자세를 지니게 해야 한다.

 진정한 좋은 삶(well being?)의 미래도 그 바탕 위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전주세계소리축제 총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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