⑥ 가시리
⑥ 가시리
  • 이동희
  • 승인 2006.02.20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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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시리 가시리이꼬 나난

 버리고 가시리이꼬 나난

 

 날러는 어찌 살라 하고

 버리고 가시리이꼬

 

 붙잡아 두어리마는

 서운하면 아니 올세라

 

 설운 임 보내옵나니 나난

 가시는 듯 돌아오소서 나난

 

 -작자 미상「가시리」전문

 

 ‘우리도 몰랐던 한국의 힘’이라는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 우리의 단점으로 알았던 민족적 기질들이 우리를 발전시킨 원동력이었다는 것이다. 전쟁의 잿더미로부터 부흥의 깃발을 휘날리는 나라, OECD 국가 중 유일하게 식민지로부터 독립하여 민주주의와 경제부흥을 이룩한 나라, 경제규모 세계 11위를 기록하는 나라. 21세기 최첨단 IT산업과 그 기반시설이 세계 1위인 나라 등등 헤아리기도 벅차다.

 동남아시아에서 ‘빨리빨리’는 한국인을 지칭하는 대명사로 쓰인다는데, 그런 조급증이 속도를 생명으로 하는 IT산업을 일으킨 원동력이 되었으며, 논밭은 물론 유일한 영농자산 농우까지 팔아서라도 자식을 가르치려 했던 뜨거운 교육열이 산업발전의 주체인 인재를 양성하고 공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유전자적 특성이 아니고서는 설명할 길이 없는 것으로 ‘기러기 아빠’가 있다. 교육열풍과도 일맥상통하는 이 현상을 외국인들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다. 어떻게 어린 자식의 교육을 위해 부모와 자식이, 아내와 남편이 이국 만리, 수년간을 떨어져 살 수 있느냐는 것이다. 더구나 국내에 남겨진 아버지(남편)는 자식들의 교육비와 아내의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하여 장기간의 외톨이(기러기) 생활을 감내할 수 있단 말이냐며 놀란다는 것이다.

 그 외국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정서적 맥락에 ‘별리(別離)의 감성’이 있다. 우리 민족에게 이별(離別)은 그리 낯선 모습이 아니다. 우리는 생이별이건 예고된 이별이건 이별을 감내할 줄 아는 본능을 지니고 있다. 이별이 곧 만남이요, 만남이 곧 이별이 되는 것을 다반사로 여기는 우리를 보면서 외국인들은 무슨 심오한 동양 철학을 터득한 수행선승처럼 볼 지도 모르지만, 우리 민족에게 있어 이별만큼 익숙한 삶의 현상들도 그리 드물지 않다.

 이별의 정한을 노래함으로써 한국인다운 정서를 표출한 민요와 이별시들의 시원(始原)이 ‘가시리’다. 화자는 별리의 상황을 확인하는 데서부터 자신의 슬픔을 추스른다. 얼마나 애절했으면 숨 가쁘게 세 번이나 반복해서 이별을 확인하고자 했을까? 이쯤 되면 아무리 강심장의 소유자라도 선뜻 이별을 고집할 수는 없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삶이 항상 마땅한 것으로만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은 천 년 전 고려 여인이 이미 마련하고 있다.

 이 화자가 한국적 여인으로서 만만치 않은 내공의 힘을 보여주는 대목은 바로 3연이다. 이 부당한 이별을 허용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짐짓 (어쩔 수 없는 운명인 것처럼 여기며)일단 보내드린다는 선언이 바로 그것이다. (얼마든지 떠나가는 임을)잡아둘 수도 있지만, 별리를 허락한다는 것이다. 사랑이 눈뜨는 봄에 짐짓 임을 보냈던 매창(梅窓)처럼, 떠나감이 곧 돌아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미 간파한 만해(萬海)처럼, 고려의 여인은 임을 보낸다.

 기정사실화된 별리는 4연에 와서 만남의 실마리를 만든다. 봄에 떠나간 임이 추풍낙엽이 될 때까지 무질러 있어서는 안 되듯이(매창), 동짓달 기나긴 밤까지 나를 독수공방 처량한 신세로 버려두어서는 안 되듯이(황진이),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 무정한 임처럼 함흥차사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민요)는 하소연으로 결구에 이른다.

 만남이 운명적인 개인사의 영역이라면, 이별 역시 만남 못지않다. 생나무 가지를 찢는 아픔까지도 우리는 아름다운 리듬과 정감어린 서정으로 노래할 줄 알았다. 우리 민족은 별리의 아픔이 끝내 절망이 아니라, 새로운 희망으로 승화시킬 줄 아는 슬기를 지니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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