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조준의 시
9. 조준의 시
  • 이동희
  • 승인 2006.03.13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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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량에 정비례하는 감성의 호사
 술을 취케 먹고 오다가 공산(空山)에 자니

 뉘 날 깨우리, 천지 즉 금침(衾枕)이로다

 광풍이 세우(細雨)를 몰아 잠든 나를 깨와다.

 

 -조준(1346~1405) 고려·조선 문신

 

 직장 초년병 시절 술은 인생과 세상을 터득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였다. 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당시 직장 상사나 동료들은 새로운 인관관계의 중요한 척도로 술을 꼽았다. 만남의 자리나 중요한 생활의 길목마다 어김없이 술이 등장했다.

 그러나 근래의 음주문화는 전혀 새로운 양상으로 변질되고 있다. 급격히 변화해 가는 사회 환경에 따라가며 시대와 상호작용해야 살아남는 현대인들의 자구책이 아닌가 한다.

 현대인의 필수품인 자동차를 운전해야 하는 생활 풍토와 시시각각 밀려오는 새로운 작업환경을 소화하고 개척해 내기 위해서는 항상 긴장하고 살아야 한다. 그런 척박한 업무 환경 속에서 언제 술을 벗하며, 언제 술타령으로 시간과 정력을 소비할 수 있겠는가?

 갈수록 음주문화의 멋이 사라져가고 있는 때에 여말(麗末) 선초(鮮初)의 문신이었던 조준의 호기가 새삼 그립다. 술을 취하도록 마신 이유야 얼마든지 들 수 있다.

 고려 충목왕 시절 성명(性命)을 받은 몸으로 이성계를 도와 역성혁명으로 조선조를 여는 데 일조했던 개국 공신으로서, 왜 술 마셔야 할 이유가 없었겠는가? 변혁의 시대가 손에 잡히는 듯하다.

 술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 술을 아무리 마셔도 의식의 잠이 깰 것 같다는 것은 그야말로 생각일 뿐이다. 술을 마실수록 취하는 것은 사필귀정, 조준은 취하도록 마시고 아무것도 없는 빈산(空山)에서 잠을 잔다. 아니 잠을 잔다기보다 인사불성(人事不省)이 되는 것이다. 차라리 그러기를 내심으로 원했는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없는 빈산에서 의식의 끈이 끊어지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어디를 돌아볼 것인가? 누구를 향하여 변혁의 고민을 나눌 것인가? 그는 빈산에 육신을 누이고 깊은 잠에 빠진다.

 그럴 때 자신의 내심을 들여다볼 사람은 흔치 않다. 날 깨워서 바른 길을 제시할 사람은 많지 않다. 아무도 날 깨워서 역사의 바른길을 동행하자고 청할 사람도 없다. 있다면 오직 하늘땅(天地)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조준은 하늘땅을 비취금(翡翠衾)이자 원앙침(鴛鴦枕)으로 삼아서 평안한 취침에 든다. 술이 주는 평화로움이요, 술이 가져온 행복한 순간이다. 하늘만큼은 자신의 진실을 알고, 땅만큼은 자신의 마음을 받아줄 것이라는 판단이 전제된다.

 인간이 산다고 하지만, 그 삶을 삼등분한 하나는 이부자리 속에서 몸을 누인 채 지낸다. 그래서 비취금 원앙침은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만을 전제하지는 않는다.

 인간이 행복을 만끽하고 평안을 유지할 수 있는 최적의 상태가 바로 이부자리라는 암시다. 화자는 그런 행복감을 취기를 빌어 맛보고 있다. 비록 착각일망정 하늘을 지붕 삼고 땅을 안방 삼아 최적의 행복감에 빠져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원초적 행복도 잠깐, 시대의 미친바람(狂風)은 그런 안락을 허용하지 않는다. 멀쩡하던 광명 천지를 휘몰아가는 것이 시대의 광기요, 한 인간의 야심이다. 조용한 휴식과 평안한 취기마저도 허락지 않는 것이 당대적 상황이었는지도 모른다. 광기는 마침내 피를 부르고, 피를 부르기 전에 눈물을 부른다. 차가운 가랑비[細雨]가 화자의 침상을 침노하고, 화자의 금침을 훼방한다.

 시대에 불감(不感)한 자의 나태를 꾸짖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민감(敏感)한 자의 거짓 호사를 꾸짖는 것은 아닌지. 주사(酒肆)에 의지하여 시대의 격랑을 헤쳐나아가려는 의도야 천년의 세월에도 변함없겠으나, 천지를 금침 삼아 호사를 부리는 조준이 자못 부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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