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마음이 어린 후니
10. 마음이 어린 후니
  • 이동희
  • 승인 2006.03.20 15: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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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이여, 그대 이름은 사랑이어라’
 마음이 어린 후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운산(萬重雲山)에 어느 임이 오리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가 하노라. 

 -서경독(1489~1546)「마음이 어린 후니」전문 

 인간의 일생 중에서 가장 순수한 때는 아마 사랑에 눈을 뜨기 시작하는 무렵일 것이다. 무엇에 씌었는지 정신은 오로지 해바라기처럼 한곳으로만 치달리고, 마음은 중병이라도 앓고 있는지 뜨겁게 고동치던 시절이 누구에게나 있었다.

 이성에 대하여 몰입하고 관심을 집중하다 보면 심장의 박동 수는 증가하고, 온몸의 감성 센서는 분주해지기 마련이다.

 우리 동네에서 오리 남짓 떨어진 곳에 교회가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기독교는 새로운 문물에 대한 호기심의 창구이자, 새로운 문화적 충격의 근원지였다. 그런 교회를 앞집 또래동무와 그의 누나를 따라 교회 나들이를 하게 되었다.

 종교가 무엇인지, 예수가 누구인지, 믿음이란 어떻게 실행하는 것인지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는 열 살을 전후한 때였을 것이다.

 이 교회를 개척한 목사님의 사택은 교회 옆에 자그마하지만 깔끔하게 지어져 있었다. 그 집에는 하얀 페인트를 칠한 사택만큼 청초한 목사님의 따님이 살았다.

 지금은 이름도 그 얼굴 생김새도 실루엣으로만 기억되지만, 그 청초했던 인상만은 지워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지금 통용되는 어른들 용어로 치자면 스캔들이 불거진 것이다. 그 주인공이 교회 목사님의 따님이요, 그 대상이 바로 나였던 것이다.

 그 발단은 소녀로부터 나에게 전해지기를 바라며 건넨 쪽지가 동무 누나의 손에 먼저 들어간 것이 화근이었다. 나야 영문도 모른 채 질책과 구박을 당할 수밖에 없었고, 무슨 큰 죄라도 지은 것처럼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아직 솜털도 가시지 않은 주제에 연애질을 흉내 내는 것이냐, 예수님을 따르라고 했더니 목사 딸만 따라다니느냐, 불공(신앙)에는 마음이 없고 잿밥(사랑 놀음)에만 마음을 두느냐, 꾸중은 가혹했으며 나를 보는 시선은 냉정했다.

 그러나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은 그런 사단이 벌어진 뒤였다. 나의 관심은 더욱 그 하얀 페인트가 칠해진 사택으로만 옮겨 갔고, 나의 시선은 그 소녀를 좇아 멈출 줄을 몰랐다. 벌칙으로 교회에 따라오는 것도 그만두라며 내침을 당한 처지에 멀리 떨어진, 교회 지붕에 세워진 십자가 첨탑만 보아도 가슴이 울렁거렸다.

 교회 종소리라도 들릴라치면 마음은 벌써 그 하얀 사택이 보이는 교회의 언저리를 맴돌고 있었다.

 들리는 바로는 소녀는 아버지로부터 금족령이 내렸다는 것이다. 소녀와 내가 무슨 일을 했단 말인가?

 지금도 궁금한 것은 그 소녀가 보냈다는 쪽지의 내용이다. 누나는 망측하고 황당해서 누구 볼까 겁난다며 손사래를 치던 그 내용이 궁금하다. 아마 모르면 모를까, 쪽지 내용은 어른을 흉내 낸 사랑 고백이었거나, 나보다는 성숙했던 소녀다운 상상력으로 꾸며진 보랏빛 감성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런 고백이 무슨 잘못이란 말인가?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목사님이 도시 근교에 있는 교회로 옮겨 가시자, 소녀도 따라서 이사를 갔다. 그것뿐이다. 어린 소견에 새로운 사목지의 주소도, 교회 이름도 수소문할 수 없었다. 동무 누나들의 대화를 어깨 너머로 들으며 짐작할 뿐이었다.

 참으로 어리석은 일지만, 무상한 세월을 건너와서도 버릇처럼, 우체통에서 소녀를 확인하고, 재잘거리며 지나가는 소녀들의 모습에서 그 소녀의 모습을 찾는다.

 누가 그랬던가? 돌아가신 부모님은 땅에 묻지만, 잃어버린 사랑은 마음에 묻는다고. 인생을 흔드는 저물녘의 바람에도, 철따라 지나가는 계절 우체통에도 소녀의 사연은 차곡차곡 쌓여만 가고 있었으니!

 그래서 어리석은 이여, 그대 이름은 사랑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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