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송순의 '꽃이 진다하고'
12. 송순의 '꽃이 진다하고'
  • 이동희
  • 승인 2006.04.03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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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쟁의 언어도 문향 있게
 꽃이 진다하고 새들아 슬워 마라

 바람에 흩날리는 꽃의 탓 아니로다

 가노라 희짓는 봄을 새워 무삼하리요.

 

 -송순(1493~1583)「꽃이 진다하고」전문

 

 새봄은 쉽게 오지 않는다. 꽃샘추위라고 하지만, 꽃을 시샘하는 겨울의 투정이라기보다는 봄을 봄답게 하려는 봄의 자기연민이 혹독한 추위로 나타난 것이리라.

 그래서 꽃이 진다해서 그리 서러워하지 만은 않는다는 화자의 심정은 알만하다. 낙화의 의미가 아주 떨어져 사라지는 소멸의 행위가 아니라, 또 다른 결실을 향한 자기완성의 몸짓이므로 꽃이 진다고 그리 서럽지 않은 것이다. 새들이 잠시나마 화려하고 향기로운 봄꽃의 군무에 현혹되었다 할지라도, 새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자신들의 삶의 앞자락을 풍요롭게 감싸 줄 녹음의 잔치가 아니던가? 그런 풍요를 예비하는 꽃의 떨어짐은 다가올 성숙의 계절 여름의 예고편일 뿐인 것이다.

 바람마저도 꽃과 대척점에 있는 상극의 관계가 아니다. 바람에 흩날리지 않는 꽃은 생식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꽃이 매몰차게 떠나면 떠날수록 꽃은 충실한 실과(實果)의 계절로 환생할 수 있으며, 바람이 세차게 불면 불수록 꽃은 더욱 튼실한 결실(結實)의 모습으로 또 다른 자아를 대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계절을 온통 휘저으며 분탕질하는 듯이 보이는 꽃샘추위마저도 미워[새워]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저 꽃으로서는 감사한 매질이요, 고마우신 손길일 뿐인 것이다. 사랑의 일깨움으로 알고 실과의 노작으로 보답하면 그뿐인 것이다.

 여기까지가 이 작품의 표면구조에 담겨 있는 시적 의표다. 이 작품의 이면에는 또 다른 함의가 이 작품을 단순구조로 읽는 것을 거부한다. 인종 원년(1545년) 을사사화로 희생된 윤임 일파를 꽃으로 비유하고, 새는 윤임 등의 희생을 안타까워하는 세인들, 봄꽃을 유린하는 거센 바람은 가해자인 윤형원 일파를 상징하며, 봄은 당대적 민생의 운명을 비유하는 것으로 해석한다면, 이 시가 드러내는 의미의 파장은 훨씬 그 진폭을 깊고 넓게 할 것이다.

 이처럼 선인들이 세련된 언어감각으로 첨예한 현실 문제를 표현함으로써 피비린내 나는 정쟁마저도 문향 넘치게 하는 것은 근래 정치계의 언어와 너무도 극명하게 대비가 된다. 요즈음 정치권에서 양산되고 있는 언어들을 보고 듣노라면 도무지 인문학적인 양식과 인간적인 염의가 실종된 막가파식 상극의 언어만이 난무하고 있는 듯이 보여 안타깝다.

 팔십 노구를 이끌고 민족 화합과 통일 초석을 놓으려는 전직 대통령의 평화통일 노력을 치매 든 노인의 망발로 단정하는 만용을 부린다. 한 나라 제1야당의 대변인을 지냈다는 사람, 여과된 표현과 세련된 언어감각을 보여주어야 할 소위 여류작가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원로 전직 대통령을 안하무인으로 보는 이들 정치인들은 현직 대통령마저도 반찬 먹은 강아지나 밥상머리 천덕꾸러기 대하듯 한다. 대통령이 고졸 출신이라 다음 대통령은 대졸 출신이 되어야 한다거나, 현직 대통령의 내치나 외치 등의 국정 수행을 막말로 깔아뭉개는 데 급급하다. 예의나 문학적 함의나 비유적 재치는 눈을 씻고 보려하지만 찾을 수가 없다.

 선인들의 문향 넘치는 명시가 새삼 소중히 여겨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쟁의 첨예함을 상생의 정신으로 순화시켜야 할 책무가 정치인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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