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운의 전원에 봄이 오니
성운의 전원에 봄이 오니
  • 이동희
  • 승인 2006.04.10 16: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분주한 일상에서 찾는 행복한 여유
 전원에 봄이 오니 이 몸이 일이 하다

 꽃나무는 뉘 옮기며 약밭은 언제 갈리

 아희야 대 베어 오너라, 삿갓 먼저 결으리라.

 

 -성운(1497~1579)「전원에 봄이 오니」전문

 

 봄만 되면 몸살을 앓는 사람이 있다. 봄만 되면 누가 부르지 않는데도 한사코 밖으로만 떠도는 사람이 있다. 들로 산으로 나다니며 온 몸으로 봄 마중에 열중인 사람이 있다.

 이 시의 화자 역시 그렇다. 시인 성운(成運)은 당대의 석학들인 이지함 · 서경덕 · 조식 등과 교유하며 학문에 정진하였던 학자였다. 배움에 전념하면서 속리산에 은거, 온전히 자연에 온몸을 맡긴 채 유유자적 살았던 분이다. 현실의 전경이 한적(閑寂)하였을지라도, 감성의 내면마저 한정(閒靜)하지는 않았으리라.

 그런 이에게 봄이 왔다. 어찌 바쁘고 설레지 않겠는가? ‘이 몸이 할 일이 많다’하지 않는가. 인간은 온전히 자연의 산물이다. 원시 인류 이래 춘하추동 계절의 변환에 얹혀살지 않던 때가 있었던가? 자연 환경은 제2의 유전인자가 되어 몸으로 의식으로 체질화된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되면, 잠들어 있던 인간의 몸에도 생동하는 기운이 치솟게 된다. 이를 일러 춘기(春氣)라느니, 춘곤(春困)이라고 굳이 이름 하지 않아도 안다. 봄이 겨우내 움츠러들던 대지를 흔들어 깨우듯이, 겨우내 움츠러들던 사람의 몸에도 봄의 서기가 맥박 치듯 약동하게 한다. 그러니 ‘이 몸이 일이 많은 것’은 당연지사!

 ‘꽃나무도 옮겨 심어야 하며, 약초 심을 밭도 갈아야 한다.’ 약동하는 봄의 서기를 놓치지 않고 삶의 터전을 가꾸어야 한다. 어찌 꽃나무 약밭뿐이겠는가? 텃밭에 남새도 심어야 하고, 겨울눈을 이기고 올라오는 마늘 순 귀여운 손길도 잡아주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샘터에 쌓여 있는 겨울 묵은 먼지들을 쓸어내고, 봄의 신선한 이야기들이 돌나물 돋듯이 돋아나도록 손길도 주어야 한다.

 꽃나무는 밖에 두어 심안(心眼)의 약으로 삼고, 약초밭에서 거둔 농작물은 입에 담아 심신(心身)의 양식으로 삼지 않던가! 그런 시심농사 약초농사로 화자는 분주하다. ‘이 몸이 일이 하다’는, 그러므로 분주한 봄의 일상성과 함께 ‘몸’으로의 분주함, 즉 봄의 서기를 감지하고 이에 호응하는 신명을 포함한다. 분주한 만큼 봄은 화자를 풍요롭게 한다.

 ‘아희야 대 베어 오너라, 삿갓 먼저 결으리라.’에는 유유자적(悠悠自適)하는 화자의 생활자세와 망중한(忙中閑)을 즐기면서 사는 여유로운 멋을 맛보게 한다. 분망한 봄, 할 일이 많은 화자에게 대나무로 엮는 삿갓부터 마련하겠다는 화자의 여유가 부럽다.

 여기에 함축되었을 함축적 의도가 짐작된다. 하나는 봄 농사를 짓기 위한 준비로서의 ‘삿갓’이다. 가혹한 봄볕을 가리기 위한 농사 준비로서의 ‘삿갓’이다. 또 하나는 봄 농사는 저만치 밀어두고 봄나들이-주유(周遊) 천하(天下)를 위한 준비로서의 ‘삿갓’이다. 할일 많은 봄이지만, 우선은 봄나들이 준비부터 해야겠다는 것이다. 현실이 조급하게 성화를 댄다고 해서 성급하게 응답할 필요가 무엇인가? 급할수록 돌아가라 하지 않던가! 화자는 ‘삿갓’을 먼저 엮음으로서 분주한 봄의 일상이 어떻게 행복한 여유로 가꾸어지는가를 노래한다.

 혹자는 시조를 일컬어 음풍농월(吟風弄月)이나 일삼던 봉건적 퇴폐물이라고 외면하는 사람이 있다. 어떤 이는 퇴락한 양반들의 지적 여흥거리라고 깔보는 이도 있다. 설사 고시조가 현실성이 결여된 관념의 장난에 치우친 감이 있다할지라도, 고시조에 담긴 생활의 여유마저 외면할 일은 아니다. 특히 유한한 인생을 망각하고 몇 백 년이라도 살듯이 설쳐대는 분주한 현대생활에서 무엇보다도 긴요한 의미와 가치를 고시조에서 찾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행복이 무엇인가를 아는 사람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