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진(晉)나라 때 면산에 들어가 불에 타죽은 개자추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더운밥을 짓지 않는다는 설과, 예부터 이 시기는 바람이 심해 불을 금하고 찬밥을 먹는다는 습관에서 그 유래를 찾기도 한다. 또한 묵은 불을 없애고 새로운 불을 만들어 쓰는 시기라는 종교적 의미도 있다. 이로 보면 한식은 ‘불’과 인연이 많아 보인다.
‘불을 찾아서’라는 프랑스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인류가 불을 발견하는 과정을 매우 사실적으로 접근한다. 언어도 없는 침묵의 영화다. 표정과 단순한 동작으로 서로 의사소통을 하는 그야말로 원시시대의 풍경이 고스란히 화면에 박힌다. 외형상 아직은 완전한 인간의 모습이랄 수 없는 인류 조상들이 불을 찾기 위해 갖은 고생을 다한다는 줄거리다.
영화에서 볼 수 있듯이 인류 문명사를 두고 볼 때, 불의 발견만큼 획기적인 사건도 없을 듯하다. 문명의 출발이 바로 불의 발견으로부터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더 생각을 밀고 나가보면 단순히 물질적 불의 발견만이 경이로운 게 아니다. 정신의 불을 밝혀 문명생활을 열어가는 힘, 그것이 바로 불씨를 만들면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불은 대상을 밝게 하여 인류에게 판단하고 가치의 유용성을 가늠케 하는 ‘이성의 빛’을 주었다.
한식을 전후로 우리는 조상의 묘소를 찾아 사초를 하기도 하고 산으로 들로 봄맞이 나들이도 한다. 이럴 때면 으레 전국적으로 산불이 발생해 엄청난 인명과 재산 피해를 낸다. 선인들이 한식날을 정해 왜 불의 의미를 강조했는지 살필 일이다.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있어왔던 일들을 되새겨 오늘을 비쳐보는 일, 이것이야말로 온고지신의 해법이 아니던가. 이즈음 울기 시작하는 포곡조(곡식의 종자를 심으라는 뜻으로 포곡포곡 우는 새) 뻐꾸기가 우는 것은 ‘불’의 의미를 되새겨 삶의 둘레를 살피라는 자연의 음성이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