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완전성 정리
불완전성 정리
  • 김인수
  • 승인 2006.04.27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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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알려져 있듯이 괴델은 20세기 수학을 대표하는 천재 수학자이다. 그는 ‘타임’지의 밀레니엄 특집에서 선정한 20세기 가장 위대한 인물 100명 중 가장 위대한 수학자로 추앙받기도 했다.

 그의 학문적 업적은 수학뿐만 아니라 철학, 언어학, 컴퓨터 과학, 인공지능, 심지어 우주론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괴델”하면 으레 그의 ‘불완전성 정리’를 떠올리게 되는데, 이 정리는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는 놀라움과 당혹스러움, 그리고 충격을 불러일으킨다. 현대 수학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힐베르트에게 내던진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마치 다윗의 돌팔매처럼 힐베르트 프로그램이라는 골리앗을 무너뜨렸을 뿐만 아니라, 핵폭탄과 같은 충격으로 20세기 학문계를 강타했다. 그 충격의 여파는 지금도 생생하게 남아 있다. 올해 그가 태어난 지 꼭 100년이 되는 지금도 말이다.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는 착상은 단순하지만 실제 내용은 대단히 복잡하고 난해하다. 어쩌면 괴델이라는 천재의 삶도 그 정리를 닮았는지 모른다. 겉으로는 단순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참으로 파란만장하고 수수께끼로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쿠르트 괴델(Kurt G?del)은 1906년 4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브르노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 모든 과목에서 최고의 성적을 받은 모범생이었고, 별명이 “왜요 선생(Herr Warum, Mr. Why)”이라고 불릴 만큼 천성적으로 호기심이 강했다. 그의 형 루돌프 괴델에 따르면, 8살 때 괴델이 앓은 류머티즘은 그의 전 생애를 따라다녔던 우울증의 원인이었다.

 괴델은 이론물리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빈 대학에 진학했는데, 여기에서 그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당시 빈 대학에는 슐리크가 주도하는 빈 학파가 결성되어 계속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있었다. 당대 일류의 학자들이 모여 과학, 수학, 논리학, 철학에 대해서 논의하였던 빈 학파의 모임에 참석할 수 있었던 것은 괴델에게는 크나큰 행운이었다. 괴델은 이 모임에 참석하면서 자신의 진로를 수학과 논리학으로 바꾼다. 괴델이 힐베르트 프로그램이라는 골리앗을 알게 된 것도 이런 과정을 통해서였다.

 힐베르트 프로그램은 20세기 초에 도래하였던 이른바 수학의 위기를 정면으로 돌파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다른 영역도 아닌 수학에서 역설들이 발견되자 힐베르트는 수학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고 또 산수의 체계에서 모순이 도출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이러한 믿음에 찬물을 끼얹으며 치명타를 날린 것이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였다.

 약관 25세에 불완전성 정리라는 세계적인 업적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시대상황은 그에게 냉랭했다. 10년 가까이 그는 빈에서 강사의 신분으로 있었으며 1939년에는 히틀러 치하에서 그 강사 지위마저 박탈당했던 것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입장에서 보면 이 당시 괴델의 심정이 얼마나 끔찍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세계적 업적을 이루었다는 긍지와 자부심은 세상이 그에게 선사한 모멸감과 불신으로 얼룩졌으리라.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그가 평생 유일한 안식처로서 삼을 수 있었던 한 여인을 만났다는 사실이다. 그녀의 이름은 아델레였고 괴델보다 6년 연상인 이혼녀였으며 “밤 나방”이라는 술집의 댄서였는데, 그 당시 댄서들은 고급 창녀와 다를 바가 없었다고 한다. 당연히 가족들의 반대는 심했지만, 괴델과 아델레는 10년 가까이 교제를 한 후 1938년에 결혼을 하게 된다.

 나치즘의 광기가 극을 달리던 1939년 마침내 괴델은 유럽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다행스럽게도 괴델은 미국의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의 연구원 자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고등연구소는 괴델에게는 또 다른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1940년 이후 괴델은 프린스턴에서 비교적 평온하고 안정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아인슈타인, 모르겐슈테른, 카르납 등과의 교류는 그에게 새로운 학문적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아인슈타인과 괴델의 우정은 천재들의 세기적 우정이라 할 만큼 유명하다. 그러나 괴델이 정식 교수직위를 얻은 것은 1953년이었는데, 그동안 그가 얼마나 마음고생이 컸을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괴델이 1978년에 영양실조로 기아 상태에서 사망했다는 것은 우리를 갸우뚱거리게 만든다. 괴델은 누군가 자신을 독살할지도 모른다는 편집증에 시달리며 음식에 들어 있는 세균을 두려워하면서 모든 음식을 거부했다. 키 168cm에 29kg의 몸무게로 태아의 자세로 웅크리고 죽음을 맞았던 것이다.

 괴델의 죽음과 관련하여 참 기묘한 것은 힐베르트와 괴델이 벌인 세기의 대결에서 힐베르트의 구원투수로 나섰던 겐첸(G. Gentzen)도 감옥에서 영양실조로 죽었다는 것이다. 또한 괴델의 핵심 아이디어를 응용하여 현대 컴퓨터의 모태를 창안해낸 튜링(A. Turing)이 스스로 청산가리에 담갔던 사과를 베어 먹고 자살했다는 것도 아이러니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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