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시조시인 가람 이병기
14. 시조시인 가람 이병기
  • 이원희
  • 승인 2006.04.30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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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심지를 돋워 삶을 벼리다
사람이 본받고 살아야 할 영원한 대상은 무엇인가. 생각하기에 따라 그 대상은 다양할 것이다.

 신, 위대한 성현, 역사적인 영웅, 부모, 스승, 이웃의 어른... 그러나 바다의 동서를 막론하고 인류에게 빛을 던진 위대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연을 삶의 기준으로 삼았다. 자연을 통해 이성의 빛을 발견했으며 지혜의 샘물을 얻었다.

 고대 희랍의 자연철학자들 이래 정신과 과학을 발전시킨 수많은 인물들의 스승은 다름 아닌 자연이었다. 잠자리에서 헬리콥터가, 민들레 홀씨에서 낙하산이, 벌집에서 아파트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문명의 씨앗이 자연에서 움텄다는 걸 말해준다.

 희랍철학에서 관상과 실천은 삶을 견고하게 세우는 인간의 덕목이었다. 자연을 고요하게 바라보는 것, 이를 관상(觀想) 즉 테오리아(theoria)라고 한다. 자연을 관찰하면서 삶의 지혜를 구하고 지침을 찾는 일이다. 한편 자연 관찰에서 얻은 것을 실천하는 행위를 프락시스(praxis)라고 한다. 테오리아와 프락시스. 이 두 힘을 균형있게 유지하면서 인간은 삶을 밝게 하려고 했다.

 전라북도 익산군 여산면 원수리 진사동에서 태어난 가람 이병기. 그는 한국문학사에서 중요한 국문학자요, 시조시인이다.

 가람은 일제강점의 험열한 시대를 가로질러 오면서 단 한 번도 친일행위나 글줄을 써내지 않은 올곧은 선비였다. 가람의 꼿꼿함과 청정한 삶의 자세는 가히 주변에서 찾기 어려울 정도로 독보적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정신의 힘은 어디서 터져나오는 것일까. ‘빵은 육체나 기를 따름이지만 난은 정신을 기른다’고 가람은 입버릇처럼 되뇌었다고 한다.

 가람의 시조에는 난초, 수선화, 매화 등이 유난히 눈에 띤다.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 / 가짓빛 굵은 대공 하얀한 꽃이 벌고 /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 본대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 / 정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두고 / 미진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 받어 사느니라’ 난초시 가운데 한 편인 ‘난초4’의 작품이다. 난초의 고결한 성품을 읽어내는 시인의 눈빛. 이 눈빛을 열어 시인은 자신의 삶을 벼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난초는 가람에게 있어서 이상적 대상이자 삶의 푯대를 세워주는 스승인 셈이다. 가람이 청정한 삶의 태도를 견지했던 프락시스의 원천은 난초의 관상이었다.

 난초의 생리를 통해 인생의 오도를 발견한 가람. 식민지, 해방, 전쟁, 혁명, 쿠데타... 숨 막히는 격동의 한국 근대사를 뚫고 오면서도 꼿꼿한 선비정신으로 국문학을 정립하고 시조문학의 현대화를 위해 오롯한 길을 걷게 한 큰 힘은 바로 뜨락에 조촐하게 핀 난초송이에서 나왔다.

 한 송이 꽃에서 우주를 본다던 윌리엄 블레이크처럼, 가람 역시 난초에서 인생을 밝히는 도를 찾았다. 가람의 형형한 눈빛이 봄날의 햇살 속에서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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