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들에게 부모는 마냥 거부와 저항의 존재인가. 어쩌면 삶의 과정이란 부모와 자식 사이의 갈등과 쟁투의 영속일거라는 불온한 생각이 든다. 존재의 터인 부모를 거부하면서 자식이 탄생하는 모순의 싸움. 낡은 것을 뚫고 일어나는 새 것의 분출, 이 두 힘 사이에 인간 존재의 비극성이 존재한다. 낡은 것은 한물갔으니 쓰러질 수밖에 없고 새 것은 약동하는 생명의 의지가 있기에 낡은 것을 파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낡아진다는 의미가 오직 자연적인 소멸이 아니라는 점이다. 온전한 새 것을 만들어주기 위한 자기파괴 행위가 곧 낡음의 의미이다. 부모의 자식 사랑은 바로 이 점, 자식의 행복과 안전을 위해 부모의 희생행위다. 천승세의 ‘만선’ 역시 어머니의 거룩한 눈물을 보이는 작품이다. 삼대의 목숨을 바다에 묻은 것도 모자라 ‘청대’같은 아들 셋을 바다에서 잃은 ‘구포댁’은 강포에 쌓인 어린 갓난애를 뭍으로 보내 목숨을 보전하려고 한다. 어머니의 이 지악한 마음은 먹고사는 일보다도, 남편의 욕망보다도 앞선다. 아일랜드 극작가 존 밀링턴 싱의 ‘바다로 가는 기사들’을 연상케 하는 이 작품에서 구포댁은 진정 어머니의 초상화가 아닌지.
동서의 연극작품에서 어머니의 거룩하고 눈부신 사랑은 하늘의 별처럼 찬란하게 많다. 사람이라는 이름의 꽃, 어머니. 그 존재가 있기에 인간의 마음은 희망으로 열려 있다. 어버이날이다. 카네이션 꽃잔치만이 아니라 이 참에 어머니의 존재적인 의미를 찬찬히 새겨 가슴에 담아봄이 어떨까. 어머니의 눈물을 닦을 수 있는 건 어머니를 울게 한 우리 아들딸이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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