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매창의 시조
16. 매창의 시조
  • 이동희
  • 승인 2006.05.08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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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화우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

 추풍 낙엽에 저도 나를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매창(梅窓)(1513~1550)의 시조 전문

 

 전북 부안(扶安)은 사람살이에 필요한 온갖 요소들을 고루 갖추고 있다. 그래서 ‘사거(死去) 용인(龍仁) 생거(生居) 부안(扶安)’ 이라고 하는가 보다. 여기에 조선의 여류시인 매창(梅窓)이 있어 더욱 문향으로 빛이 나는 곳이 부안이다.

 그녀는 기생이었다. 계량(桂娘) 계생(桂生)은 매창과 함께 불렸던 그의 아호였으며, 향금(香今)은 이씨 성을 지닌 그녀의 본명으로 전한다. 문학사에 따르면 그녀는 가사와 한시는 물론 가무(歌舞)와 현금(玄琴)에도 능했으며, 70여 수의 한시와 금석문(金石文)까지 전해진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매창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던 생전의 김민성 시인에 의하면 무려 400여 수에 이르는 매창의 작품을 발굴할 수 있었다고 증언한다.

 매창의 시는 그녀 사후 450여년이 흐른 오늘의 관점에서 보아도 예삿일이 아니다. 작품 면면을 대하노라면 천민 기녀로서의 삶이 얼마나 간고(艱苦)했던 가를 짐작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녀는 그 아릿한 심정을 차곡차곡 시심으로 다지며 시대의 아픔을 새겼다. 이렇게 시를 남기면서 ‘인생은 짧으나 예술은 길다’는 믿음을 간직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이 작품도 이런 심성에서 멀지 않다. 한번 마음 주기로 언약한 연정의 상대가 있다. 그 사내는 이설(利說)까지는 아니어도 아마 무수한 감언(甘言)을 남발하였을 것이다. 온 천지는 봄이 아닌가! 들에도 산에도, 온통 하얀 배꽃이 점령하여 그렇지 않아도 설레는 마음을 들쑤시고 있지 않는가. 흐드러진 배꽃이 춘풍에 실려 때 아닌 꽃비[梨花雨]가 쏟아지고 있지 않는가. 어찌 이별이란 말인가? 눈보라처럼 흩날리는 배꽃 동산에서 어찌 울며 임을 떠나보내야 하는가? 그래도 운명을 거역할 수는 없는 것. 그렇게 별리의 언약-감언이 꽃비처럼 흩날렸으리라. ‘가시난 ? 도셔 오겠다’고 다짐하거나, 이 배꽃이 과실이 되기 전에 돌아오겠다고 달콤하게 속삭였을 것이다.

 봄날이 그렇게 꽃비 속에 가도, 여름날은 또 구름비 속에 그렇게 가도, 감언을 꽃비처럼 남기고 드디어 가을이 와도 화자는 오매불망(寤寐不忘), 떠나간 임을 잊지 않았다. 가을바람은 불어 마음 깃을 여미게 하고, 낙엽은 떨어져 뿌리로 돌아가려 하지 않는가. 임의 마음은 지금 어느 벌판 어느 계절에 머물고 계신가? 사랑의 시원이었던 봄동산을 벌써 잊지는 않으셨는가? 바람은 불어 가을을 재촉하고, 낙엽은 떨어져 임을 더욱 그립게 하는데…

 매창은 갔어도 그의 사랑은 천리를 오락가락하며 지금도 뜨겁다. 이 사랑이 있어 봄이면 어김없이 꽃이 피고, 가을이면 어김없이 낙엽을 불러온다. 사랑이 있음으로 가능한 일이다. 아니 사랑하는 사람에게나 있을법한 기적이다. 그래서 인생은 비록 짧으나 사랑은 무한한 것인가? 그렇다. 사랑은 길다. 사랑을 노래한 예술은 더욱 길다.

 어떤 사람들은 육신의 쾌락으로 인생을 늘려 보려 한다. 어떤 이들은 권력의 자락에 매달려 계절을 연장해 보려 한다. 또 어떤 이들은 한 줌도 안 되는 지상의 재물로 금자탑을 세워 보려 한다. 다 무망한 일이다. 사랑이 없으면 모두가 허망한 일이다.

 매창이 그런 사랑을 노래하고 있지 않는가? 호사를 극하던 쾌락도 미풍에 날아간 한숨이 되고, 천지를 진동시킬 듯이 으르렁거리던 권력도 삭정이 재처럼 스러지며, 곳간마다 넘쳐나던 풍요도 모두가 북망산천으로 날아가 버린 날, 매창은 홀로 천 리를 오락가락하며 임을 만나고 있지 않는가! 만 리를 내왕하며 임을 부르지 않는가! 하느님이 할 수 없는 일을 인간이 하는 일을 기적이라고 한다. 매창 시인은 사랑노래로 영원을 사는 기적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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